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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은경의 법률리뷰

처벌이 범람하는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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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이은경 법무법인 산지 대표변호사

이은경 법무법인 산지 대표변호사

1983년 법과대학 1학년 형법 시간이었다. “99명의 죄인을 놓치더라도 한 명의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지 말라”는 교수님 말씀이 뇌리에 남았다. ‘법은 공리주의가 아니구나, 단 한 사람이라도 굉장히 귀중하게 여기는구나!’ 생각했다. 범죄자까지 일탈한 동료 시민의 하나로 상정했고, 형벌도 응보를 뛰어넘는 포섭이 주목적이라고 배웠다. 꽤 노블한 학문이란 생각이 들었고, 법학의 매력에 점점 빠져들었다. “법의 뿌리는 사랑이고, 사랑이 법의 완성”이란 다짐이 마음에 새겨졌다.

1991년 남부지법 판사 발령을 받았다. 판단이 매일 수행하는 직업으로 주어졌다. 내게 필수적인 건 법률조항만이 아니었다. 수없이 다양한 인간 이해도, 세상의 변화에 대한 지식도 절실했다. 고뇌가 컸다. 실체적 진실의 발견은 신의 영역처럼 느껴졌고, 주어진 판단의 자리는 무겁고 부담스러웠다. 법정 진술은 정교하게 구성한 논증이지 실체적 진실이 아니었다. 사람의 의식에 담긴 진실은 법대에서 들여다보는 게 너무 어려웠고, 함부로 다룰 수 있는 영역도 아니었다. 마지막에 의지한 건 적법 절차 원칙이었다.

‘법의 뿌리는 사랑’ 유효한가
갈수록 높아지는 엄벌주의 풍조
‘처벌 카드’ 남발하는 정치권
무고한 피해자, 나는 예외일까

2002년 11년 근무를 끝으로 변호사 배지를 달았다. 판단자에서 조력자로 내려왔다. 솔직히 힘든 나날이 많았지만, 다행히 적성엔 잘 맞았다. 법복을 벗은 홀가분함 속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났고, 변론도 진심을 담았다. 마침 재판 트렌드가 변하는 듯싶더니 판사 재량을 제한하는 양형기준이 탄생했다. 객관적 기준을 찾다 보니 ‘사람’ 보다 ‘죄’ 중심으로 재판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다. 그래선지 ‘죄를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구태의연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도식적인 양형기준에 매달리기보다 한 인간에 대한 총체적 이해 속에서 변론을 하는 게 더 진솔한 재판은 아닐지 고민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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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형사재판에 대한 성찰이 올 거란 내 예상과 달리 우리나라는 처벌을 통해 사회를 통제하려는 경향이 점점 거세졌다. 사회적 물의를 빚은 범죄자는 동료 시민이 아니라, 사회의 적으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팽배했고, 이들을 선임한 변호사마저 지탄의 대상이 됐다. 극악무도한 범죄조차 ‘엄격한 증명’이 필요하고, 인간이길 포기한 사람에게도 ‘변호인선임권’만은 보장해야 한다는 헌법정신이 슬그머니 사라진 듯했다. 심지어 법치국가적 보장장치에 걸맞지 않은 ‘공동사회의 적’에겐 권리에 대한 예외를 광범위하게 허용해야 한다는 ‘적대형법 이론’까지 등장했다. 인간을 짐승과 같은 존재로 간주해야 한다는 건지 죄와 벌에 대한 인식이 혼란스러웠다.

요새 우리나라에 불고 있는 엄벌주의 사조는 사회적 불안에 대한 감정적 대응이 여러 요인 중 하나인 듯하다. 문제는 감정과 이성이 충돌할 경우 이성이 승리하는 건 매우 드물다는 점이다. 감성을 저격해 편향을 유도하는 지금의 알고리즘 세상에선 더욱 그렇다. 조금 우려스러운 건, 장래의 효과보다 지금의 느낌이 중요한 ‘감성’의 영역에 정치가 적극적으로 편승하는 경향이다. 요새 정치인들은 법치국가적 인권보장책을 가볍게 여기고, 죄형법정주의의 원칙도 고무줄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새로 등장하는 법률마다 정확히 짜인 조건 대신 느슨히 풀린 목적만 선전하고 있지 않은가. 고상한 취지만 반복해 설명할 뿐, 무엇이 처벌받는 행위인지 명확히 알기도 힘들다. 그뿐인가. 금지의무는 셀 수도 없고, 수북이 쌓인 처벌조항은 어깨를 짓누른다. ‘처벌카드’를 손쉽게 만지작거리는 정치를 우려하는 이유다. 사회정책의 최후수단이 형사정책이고, 형사정책의 최후수단이 형사처벌이란 오랜 경구도 사라질 판이다.

오늘날 형벌은 더 이상 ‘도덕의 최소한’이 아닌 것 같다. 국민 계몽이란 수단으로 ‘처벌카드’를 휘두르는 현실이 심심찮게 펼쳐지니 말이다. 걸핏하면, 처벌로 위협해 각종 정책을 밀어붙이고, 눈앞의 여론만 잠재우는 경향이 과연 언제까지 유행할 건지 답답한 심정이다. 인권이 과거로 역주행할 위험성이 다분하고, 마지막은 처벌이 범람하는 사회의 도래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무고한 피해자를 양산할 수 있고, 여기엔 어느 사람도 예외일 수 없다.

나는 풋풋한 20대 품었던 희망을 지금도 마음 한편에 두고 있다. 재판과 징벌이라는 과정을 통해 억울한 희생자는 걸러내고, 뉘우친 범죄자는 포섭한다는 ‘희망’ 말이다.

이은경 법무법인 산지 대표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