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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우크라이나 침공과 ‘독을 품은 새우’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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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7호 31면

윤영관 서울대 명예교수·전 외교통상부 장관

윤영관 서울대 명예교수·전 외교통상부 장관

이틀 전인 지난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전면 침공했고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그런데 미국은 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을 막지 못했을까? 그것은 러시아의 현상 변경 의지에 비해 이것을 막겠다는 미국의 의지가 훨씬 약했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국가들은 러시아가 지난해 4월부터 군사력을 국경지대에 집중 배치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군사력 사용을 통한 강한 억제(deterrence) 의지를 보여 주지 못했다. 외교적 해결만 시도했을 뿐인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이러한 서방측의 강한 의지 결여를 간파하고 허점을 파고들었다.

미국의 군사력 사용 의지 결여에는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제국적 자만심(hubris)에 대한 역작용이라는 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의 후유증으로 과도한 군사개입을 피하고자 하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 이래 미국은 세계 분쟁지역에서 주도적인 해결사 역할을 하지 못하고 흔들리며 위축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예를 들어 오바마 행정부가 시리아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이 화학무기를 사용하면 군사공격을 하겠다고 레드라인을 그어 놓고 2013년 그것을 어겼는데도 못 본 체했던 것은 미국 리더십에 치명적 타격이었다. 반면 러시아는 2015년 시리아에 개입해 내전의 흐름을 바꾸고, 알아사드 정권을 되살려내면서 역내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강화했다.

제국적 프로젝트에 희생 경험 한국
독을 품은 새우까지는 안 되어도
경제력 맞는 외교의 격 갖춰야
대러시아 제제 동참은 잘한 일

어찌 되었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2022년 2월은 유럽 및 세계정치사에서 중요한 변곡점이 될 것이다. 이제 유럽은 ‘침공 이전’과 ‘침공 이후’의 시기로 확연히 구분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침공 이후 유럽정치는 군사화할 것이다. 이제까지 유럽국가들은 나토라는 미국 주도의 집단방어체제와 유럽연합(EU)이라는 정치경제 협력체의 틀 안에서 대체로 안보에 대한 큰 걱정 없이 살아왔다. 그러면서 제각각 러시아와의 이런저런 경제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미국과는 대러 정책과 관련해 부딪치기도 하면서 지내 왔다. 예를 들어 독일은 미국이 반대하는 노르트스트림2 가스파이프라인 건설을 고집했고, 프랑스는 유럽의 독자 역할을 강조하면서 미국과 결이 다른 목소리를 내곤 했다.

선데이 칼럼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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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럴 여유가 사라졌다. 푸틴은 국제법을 적나라하게 위반하며 군사력을 행사했다. 그에게는 러시아의 바로 이웃에 우크라이나가 성공한 민주국가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위협이다. 따라서 그는 우크라이나의 군사력을 궤멸하고 정부 기능과 경제 인프라 등을 파괴하여 극도로 혼란스러운 실패국가로 만들 것이다. 더 나아가 그가 1997년 이전으로 나토 확장을 되돌리라고 요구한 것과 최근 러시아의 핵무기에 대해 언급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그의 ‘소련제국의 영광 되살리기’ 프로젝트가 우크라이나에서 끝나지 않고 앞으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까지, 더 나아가 폴란드, 루마니아, 슬로바키아로 확장되어 갈 수 있음을 예상케 한다. 미국과 나토의 핵심 국가들은 이들 국가들에게 어떻게 안전보장을 해 줄 것이냐가 큰 과제가 되었다. 핀란드와 스웨덴도 불안해 할 것이고 이들이 원한다면 나토 가입 문제가 논의될 것이다. 이제 경제가 아니라 군사안보가 유럽 국제관계를 규정하는 1차 변수가 된 것이다. 미국과 유럽이 얼마나 단결할 것인지, 서방 국가들의 경제제재와 이에 대응한 러시아의 에너지, 사이버 및 다양한 교란작전이 어떻게 진행될지가 관건이다.

여기서 중요 관심 사항은 두 가지다. 첫째는 미국의 딜레마이고, 둘째는 중국의 반응이다. 미국은 이른바 ‘유럽으로의 귀환(Pivot to Europe)’을 추진해야만 될 상황이다. 중국을 의식한 ‘아시아로의 귀환(Pivot to Asia)’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유럽을 단합시켜 미국 쪽으로 더욱 당기지 못하면 러시아-중국의 연대에 제대로 맞서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중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적극 지지하고 후원할 것인가? 이제까지 중국은 나토 팽창 문제와 관련하여 러시아 입장을 지지해 주었다. 따라서 러시아는 서방측 경제제재의 부정적 여파를 중국이 상당 정도 완충시켜 주리라 기대할 것이다. 그러나 중국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무력침공에 대해서는 유보적이다. 다른 한편,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집중해 있을 때 중국이 대만에 다양한 공세적 행동을 취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결국 미국의 가장 큰 외교 과제는 어떻게 중국을 미국에 협조하도록 끌어당길 것이냐이다.

이제 국제정치 분석자가 아니라 한국 사람 입장에서 어떠한 입장을 취해야 할지 생각해 보자. 한국은 주변 대국들과 북한이 국제법과 규범을 위반하거나 악용하면서 추구한 제국적 프로젝트와 권력정치에 번번이 희생되어 왔다. 구한말 일제 식민지화, 북한의 남침, 중국의 6·25 참전이 그랬다. 그렇기에 러시아의 무력을 사용한 우크라이나 주권 침해에 비판적일 수밖에 없다. 1966년 리콴유 싱가포르 총리는 “큰 고기는 작은 고기를 사냥하고, 작은 고기는 새우를 잡아먹는 세상이다. 싱가포르는 독을 품은 새우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독까지 품는 것이 좀 그렇다면, 최소한 세계 10위 경제력에 맞는 ‘격(格)’ 정도는 갖추는 외교가 되어야 한다. 늦게나마 우리 정부가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키로 한 것은 잘한 일이다.

윤영관 서울대 명예교수·전 외교통상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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