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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우위사회가 조장하는 성범죄(사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2면

4개월 동안 1백50여 차례의 강도와 강간을 일삼았다는 17세 소년의 범죄 고백을 듣노라면 기가 차고,부녀자는 물론이고 임신부와 여중ㆍ고생을 가리지 않고 22차례의 성폭행을 했다는 20대 범인의 진술을 듣노라면 숨이 막힌다.
이처럼 기가 차고 숨이 막히는 일을 당하고서도 「경찰에는 단 한건만이 신고됐을 뿐이다」는 대목에 이르면 할말을 잃게 된다.
왜 이처럼 끔찍한 사고를 당하고서도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았을까. 경찰에 신고해봤자 창피만 당하고 범인은 잡지도 못할 것이라는 경찰에 대한 불신 탓일까. 아니면 기왕에 당한 일 남편 몰래 혼자서 참고 견디면 가정파탄은 막을 수 있다는 최후의 자위책일까.
이들 끔찍한 상습 가정파괴범들이 경찰에 조사를 받고 있는 동안 비슷한 피해를 본 주부들이 잇따라 경찰서로 전화를 해 항의를 했다고 한다. 항의의 골자는 보도된 범인들에 의해 피해를 본 가정이 아닌데도 강도를 당한 사실만 가지고 남편들이 주부의 말을 곧이 곧대로 듣지 않고 성폭행 여부를 추궁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임신부가 유산하고 여중 소녀가 성폭행의 충격을 이기지 못해 정신이상자가 되는 끔직한 고통을 당하고서도 당사자인 아내가 인생의 반려자인 남편에게 하소연마저 못한 채 살아가야 하는 게 오늘의 우리 가정이다.
또 강도를 당하고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도 못한 형편인데도 남편이 성폭행까지 당한 것이 아니냐고 아내를 죄인 취급하듯 다룬다면 이 얼마나 억울하고 분통터질 노릇인가.
기혼남성을 상대로 한 어느 설문조사에 따르면 아내가 성폭행 당했을 경우 남편은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이혼할 수밖에 없다」와 「별거할 수밖에 없다」가 압도적이어서 70% 이상의 남편이 성폭행 당한 아내와는 함께 살 수 없다는 충격적 의견을 표시한 적이 있었다.
물론 이 조사가 전체 남성의 뜻을 반영하고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폭행이 곧 가정파탄이라는 강력관념이 주부들 마음 속에 깊이 박혀있기 때문에 많은 주부들이 피해를 보았는데도 경찰에 신고된 건수가 단 1회뿐이라는 결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뒤집어 말한다면 남편의 아내에 대한 순결 요구가 주부의 성폭행을 은폐하게 하고 그 은폐를 기화로 흉악범들은 강도와 강간을 범인들의 보호막으로 사용하는 수법이 유행처럼 번져나갔다고 볼 수 있다.
여성의 정절과 순결을 과소평가하자는 게 아니다. 폭행에 의한 사고일 수밖에 없는 성폭행을 이혼과 별거로 연결짓는 남성위주의 사회에 뭔가 잘못이 있다는 반성이 남성사회에서 일어나야 한다는 점이다.
교통사고로 치명상을 입은 아내에겐 극진한 간호를 아끼지 않는 남편이 흉악범에 의해 성폭행 당한 아내에겐 이혼할 수밖에 없다는 사고는 남성 쇼비니즘일 수밖에 없다.
남성우위의 사회 속에 잠재된 잘못된 여성관,여성을 성의 도구로만 여기는 그릇된 허위의식이 남성들에게 고루 만연되어 있음을 뜻한다. 겉으로는 여성의 순결을 예찬하지만 속으로는 섹스의 도구로 여길 뿐이다. 아내가 성폭행 당했다면 자신이 소중하게 지니고 놀던 장난감이 불한당에 의해 망가졌다는 잠재의식으로 분노하는 것이다.
왜 지난 몇년 동안 인신매매단이 백주대로에까지 활개를 쳤던가. 공권력의 약화와 치안의 무책ㆍ무능도 중요한 요인이었겠지만 그 많은 여성들을 성의 노리개로 차지하려 했던 남성들의 수요가 그 만큼 높았기 때문이다.
점잖고 도덕적인 가장이 밤이면 남의 여성을 찾아 유흥가를 누비고 퇴폐 이발소와 목욕탕을 찾아 섹스의 향연에 골몰하면서도 밤늦게 귀가하는 남편을 기다리다 강도에 의해 성폭행 당한 아내에게는 정절과 순결을 따지고 든다.
결국 인신매매단이나 성폭행범과 같은 인간쓰레기들이 이 사회를 병들게 하는 뒤편에는 남성우위의 잘못된 허위의식이 도사리고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성을 남성의 노리개로 다루는 잘못된 남성우위의 풍조가 존재하는 한 사회악은 근절될 수 없다는 인식에 합의해야 할 것이다.
진정한 남편의 남성다움은 비록 아내가 성폭행 당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교통사고와 같은 불의의 사고로 여기면서 아내의 고통을 감싸고 치유를 돕고 극복의 용기를 보이는 데 있다. 또 그런 사고가 재발하지 않도록 신고하고 범인을 잡는 데 총력을 기울이는 데 남성다움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런 극복의 노력이 남성사회에서 자진해 일어날 때 가정의 건전성와 여성의 순결이 보호될 수 있는 사회분위기가 조성될 것이고 그런 분위기가 성폭행이 강도의 신고 저지수단으로 이용되는 원시적 범죄형태를 막는 수단이 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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