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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분단된 줄도 몰랐다"는 페일린, 뉴욕타임스에 패소한 까닭

중앙일보

입력

10일(현지시간) 뉴욕 법정을 나서는 세라 페일린 전 부통령 후보. AP=연합뉴스

10일(현지시간) 뉴욕 법정을 나서는 세라 페일린 전 부통령 후보. AP=연합뉴스

미국 공화당 부통령 후보였던 세라 페일린(58) 전 알래스카 주지사가 뉴욕타임스(NYT)를 상대로 제기한 명예훼손 소송에서 15일(현지시간) 패소했다. 고(故) 존 매케인 대통령 후보가 러닝메이트로 지목하며 일약 신데렐라로 떠올랐다가 잦은 구설로 정치적 입지가 추락했던 그 페일린 얘기다. 2008년 버락 오바마 당시 민주당 후보와 맞붙었던 매케인은 공화당에 상대적으로 부족했던 젠더 감수성 및 젊은 피 수혈 등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 페일린을 발탁했었다. 그러나 매케인은 이 결정을 추후 후회했으며, 그의 장례식에 페일린은 초대받지도 못했다.

문제는 페일린이 자질 부족으로 비판받았다는 데 있다. 페일린은 대선 레이스 중 언론 인터뷰 등에서 ‘부시 독트린’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게 뭐냐”고 되묻거나 “미국은 우리의 동맹인 북한 편에 서야 한다”고 말하는 등 실수를 연발했다. 베테랑 정치 기자들인 마크 핼퍼린 타임지 기자와 존 하일먼 뉴욕매거진 기자는 공저 『게임 체인지(Game Change)』에서 “(페일린은) 한반도가 왜 남북으로 분단됐는지 조차 몰랐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페일린은 대선에서 큰 차이로 패한 뒤 남은 주지사 임기를 부지사에게 넘기고 재선에 불출마했다. 이후 보수 성향 폭스뉴스 TV쇼를 진행하는 등 정치평론가 겸 방송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15일(현지시간) 뉴욕 맨해튼 남부법원 나서는 세라 페일린. 로이터=연합뉴스

15일(현지시간) 뉴욕 맨해튼 남부법원 나서는 세라 페일린. 로이터=연합뉴스

그런 그가 NYT와 다시 신경전을 벌인 건 2017년 6월 14일 총기 사고 관련 사설 때문이다. 버지니아주의 한 야구장에서 공화당 하원의원 스티브 스컬리스가 야구 연습 도중 총격을 받아 다친 사건을 두고 NYT는 “미국 정치가 잔인해졌다”면서 지난 2011년 민주당 가브리엘 기퍼즈 하원의원이 중태에 빠지고 6명이 숨진 애리조나주 총기 사건을 거론했다. 이 과정에서 NYT는 ‘페일린이 이끄는 정치행동위원회가 낙마시켜야 할 민주당 현역의원 20명의 지역구를 표시한 지도를 유포했다’고 언급했는데, 이 부분을 페일린 측이 문제 삼은 것이다.

당시 증거도 없이 총기 난사범과 지도를 무리하게 연관 지었다는 비판이 제기됐고, NYT는 이를 받아들여 “두 사안의 연관성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정정했다. 그러나 페일린 전 지사는 “내가 살인을 부추겼다는 거짓 주장으로 명예가 훼손됐다”는 취지로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기사를 담당한 제임스 베넷은 재판에서 “끔찍한 실수였다”고 사과했지만, 페일린 측은 베넷이 반감을 품고 벌인 짓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재판부는 “페일린이 소송을 제기한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라면서도 고의성을 입증하지 못했다며 NYT의 손을 들어줬다.만장일치였다. 뉴욕 맨해튼 남부지법의 제드 레코프 판사는 전날 배심원 평결과 관계없이 판사 직권으로 기각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2008년 9월 3일 공화당의 존 매케인 대통령 후보(오른쪽)와 러닝메이트로 나선 세라 페일린. AP=연합뉴스

2008년 9월 3일 공화당의 존 매케인 대통령 후보(오른쪽)와 러닝메이트로 나선 세라 페일린. AP=연합뉴스

레코프 판사는 “페일린 전 지사 측은 NYT가 ‘실질적 악의’를 갖고 사설을 썼다는 점을 입증하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NYT 기사의 사실관계가 틀리긴 했지만, 미국 헌법상 언론의 자유가 우선한다는 논리다. NYT는 수십년간 명예훼손 소송 무패 행진을 이어가게 됐다. 페일린 전 지사는 항소할 것으로 보인다고 NYT는 밝혔다.

‘실질적 악의’는 1964년 미국 대법원 판결문에서 처음 나온 개념이다. 앨라배마주 공공안전 담당 공무원이 NYT의 정치광고가 자신의 명예를 훼손했다고 주장하자 대법원은 “공인은 공적인 업무에 대한 비판에서 ‘실질적 악의’가 있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고 기각했다. 래코프 판사는 이와 관련, “법이 설정한 ‘실질적 악의’에 대한 기준은 매우 높다”며 “이번 사건은 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페일린 본인도 언론인 출신이다. 알래스카주 와실라의 한 소규모 지역 신문사에서 일하다가 1992년 와실라 시의원에 당선됐다. 지역사회 비리를 폭로하면서 인기를 얻은 그는 4년 만에 와실라 시장으로 선출됐다. 2006년 알래스카 주지사 선거에서 유력 후보들을 모두 제치고 여성 최초이자 최연소로 주지사에 당선돼 파란을 일으켰다. 석유산업을 둘러싼 정·재계 유착 관계를 깨는 등 대대적인 개혁에 나서며 차세대 유력 지도자로 주목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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