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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가 될 순 없어’…그 이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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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최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현철 사회디렉터

최현철 사회디렉터

어둠이 내린 지난 8일 저녁, 도열한 구조대원들이 떠나는 119구급차를 향해 경례를 올렸다. 광주광역시 서구 화정동 아파트 신축 공사장 붕괴사고로 매몰됐던 6명 중 마지막 실종자는 이렇게 29일 만에 시신이 되어 현장을 떠났다. 지난달 1월 11일 공사 중 붕괴한 이 아파트의 모습은 1995년 삼품백화점 붕괴 현장과 매우 흡사했다. 39층부터 10여개 층이 차례로 무너지며 켜켜이 쌓인 잔해는 그때만큼이나 수색과 구조를 어렵게 했다. 성과 없이 시간이 흘러가면서 매일 지켜보는 시민들의 분노와 좌절도 수북이 쌓여갔다.

구조가 난항을 겪고 있던 지난달 중순에 만난 한 지인은 “요즘 건설업계에선 ‘1호가 될 순 없어’라는 말이 유행”이라고 전했다. 연휴 직전인 1월 27일 시행되는 중대재해처벌법 얘기였다. 이 법의 ‘1호 사건’이 되면 두고두고 언급되며 망신을 살뿐더러, 현대산업개발에 대한 분노를 대신 뒤집어쓸 것 같다고 했다. 광주 사고 아파트 시행사인 현산은 간발의 차로 법 적용을 피했다.

현산, 중대재해법 적용 모면
‘1호’가 된 삼표산업과 판박이
고 김용균 회사 대표는 무죄

하지만 1호를 피하려면 겨우내 쉬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우려는 금새 무색해졌다. 시행 이틀 만인 1월 29일 오전, 경기도 양주의 삼표산업 골재 채취장에서 폭파 작업 중 무너져 내린 토사에 3명이 매몰돼 숨졌다. 그리고 지난 8일, 경기 성남 판교의 건물 신축공사장에서 엘리베이터 설치 작업을 하던 노동자 2명이 추락사했다. 차례로 1호와 2호 사건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지난 8일 오후 광주 서구 화정아이파크 붕괴사고로 숨진 6번째 건설노동자가 26층 잔해에서 수습됐다. 구조 당국은 사고 발생 29일만에 실종자 수색과 구조를 완료했다. [연합뉴스]

지난 8일 오후 광주 서구 화정아이파크 붕괴사고로 숨진 6번째 건설노동자가 26층 잔해에서 수습됐다. 구조 당국은 사고 발생 29일만에 실종자 수색과 구조를 완료했다. [연합뉴스]

광주나 양주의 사고 모두 아직 수사가 진행 중이지만 조금씩 원인이 드러나고 있다. 광주의 경우 콘크리트가 마르는 양생 기간을 지키지 않고 무리하게 공사를 강행한 데다 규정을 어긴 채 39층 아래 세 개 층의 지지대를 제거한 것이 원인으로 지목된다. 불법 재하청 의혹도 짙다. 양주 사고 역시 무자격자가 폭파 지점을 정하게 하고, 토사를 막을 안전망도 설치하지 않았다. 두 사고는 1월 27일 전과 후에 발생했다는 차이가 있지만, 작업 현장의 고질적인 문제가 그대로 재현됐다는 점에서 판박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은 그사이 시행이 됐지만, 효과는 아직이다.

지난 9일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장은 기자간담회에서 “주변에서 중대재해처벌법 시행 이후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심정’이라는 말을 많이 한다”고 했다. 또 “사업주가 아무리 의무사항을 준수하더라도 불가피한 사고는 막을 길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동안 산업현장에서 재해로 사람이 다치거나 죽어도 보상금이나 벌금은 쥐꼬리만했다. 기업의 최고 책임자로선 막대한 비용을 쓰며 규정을 지키고 투자를 할 유인이 없다. 위험한 부분을 외주화하면 원청은 아예 책임이 없어진다. 그래서 가장 민감한 경영자의 인신구속에 연계하고, 하청의 사고에 원청도 함께 책임지게 했다. 대신 규정을 지키고, 감독을 철저히 하며, 안전 관련 투자를 성실히 했을 경우 기업 대표는 책임을 면제한다는 것이 법의 취지다.

하지만 법 시행 초기인지라 기업이든 언론이든 온통 관심은 기업 대표 중 누가 가장 먼저 구속되는가에 쏠려있다. 총수들이 대표 자리를 내놓는 식으로 직접 책임질 소지를 없애는 기업들도 나타나고 있다. 8일 발생한 판교 사고의 시행사인 요진건설산업도 그런 곳 중 하나다. 전문 경영인이 열심히 신경을 쓰겠지만, 뻔히 보이는 수익 축소 앞에서 안전 관리와 투자가 가능할지 미지수다.

아슬아슬하게 중대재해처벌법 ‘1호’를 면한 현대산업개발의 행보는 더하다. 전국적인 ‘현산 배제’ 움직임 속에서도 지난 5일 경기 안양시 관양동의 1300여 세대 규모 재건축 아파트 공사를 보란 듯이 수주했다. 평당 분양가 4800만원을 보장하고, 2조원의 사업비를 조달해 세대당 7000만원의 이주비를 지원하겠다는 등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한 결과라고 한다. 내건 조건 하나하나가 엄청난 비용을 수반한다. 그런 가운데 진행되는 저 공사는 과연 안전할까?

어제 대전지법 서산지원에선 고 김용균씨 사고와 관련해 기소된 김병숙 전 서부발전 사장과 원하청 임직원에 대한 선고공판이 열렸다. 사고 3년 2개월 만에 나온 결론은 김 전 사장 무죄, 나머지 관계자들은 대부분 집행유예였다. 이 사고로 온 국민이 분노했고, 전직 대법관이 지휘하는 조사위가 회사의 책임을 낱낱이 밝혔으며, 결국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그런데도 김 전 사장 등은 재판 내내 “규정대로 했으며, 수칙을 지키지 않은 김씨 책임이다”라는 주장을 반복했다. 법원도 상당부분 받아줬다. 아무도 감옥에 가지 않은 것보다, 이런 식이면 안전에 신경쓸 이유가 없다는 게 더 큰 문제다. 김용균이 남긴 법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