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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쪼개기 상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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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창규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김창규 경제에디터

김창규 경제에디터

얼마 전 아내가 증권계좌를 들어 보이며 이건 어떻게 된 거냐고 물었다. 아들 돌잔치 때 친척으로부터 받은 금반지 등을 팔아서 주식을 산 아들의 증권계좌였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계좌의 수익률을 조회해 봤다. -20%.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당시 국내 기간산업의 한 축을 담당하는 대기업이니 번거롭게 금붙이를 갖고 있는 것보다 이 회사 주식을 사두는 게 낫다고 아내를 설득했다. 주식은 물가상승률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우량 기업은 꾸준히 성장하고 주가도 자연스레 오를 테니 나중에 아들 대학 등록금으로도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말도 얹었다. 하지만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주가는 오히려 20% 떨어졌다. 그사이 금값은 9~10배나 올랐다. 단순히 우량 기업의 주식을 사두고 기다리면 주가가 오를 것이란 생각은 착각이었다. 아내에게 30년 가까이 경제 담당 기자를 하면서 아들 돌 반지 값도 까먹느냐는 핀잔만 들었다.

많은 증시 전문가가 “한국은 장기 투자를 하기 어려운 나라”라는 말을 많이 한다. 심지어 개인투자자 사이에선 특정 주식을 6개월 보유하고 있으면 장기투자라는 말까지 나온다. 그만큼 우량 회사까지도 주가 출렁임이 커서 오래 보유하기가 불안하다는 뜻이다. 이런 분위기 아래 깔린 건 불신이다. 투자자가 국내 주식 시장을 믿지 못하고, 투자 대상인 기업을 믿지 못한다. 그러니 개인의 선택은 두 가지다. 시장에서 발길을 돌리거나 단기간에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단타 매매에 매달린다.

기업들 이중상장 유행처럼 번져
자금 확보하고 회사 덩치도 키워
대주주엔 유리, 소액주주엔 불리
주주친화적으로 가야 시장 건전

지난달 27일 열린 LG에너지솔루션의 코스피 신규상장 기념식에서 권영수 LG에너지솔루션 대표이사가 북을 치고 있다. [뉴스1]

지난달 27일 열린 LG에너지솔루션의 코스피 신규상장 기념식에서 권영수 LG에너지솔루션 대표이사가 북을 치고 있다. [뉴스1]

A라는 상장기업이 있다고 하자. 이 회사 가치는 1조원이다. 그런데 이 회사의 한 사업부문이 유망하다. 그래서 이 회사 경영진은 이 사업부문을 떼 자회사로 둔 뒤 상장하기로 한다. 그런데 자회사의 전망이 유망하다는 소문이 돌자 투자자가 몰렸다. 자회사는 상장하자마자 모회사의 가치를 뛰어넘어 시가총액이 2조원에 육박한다. 대신 핵심 사업부서를 뗀 모회사는 자회사의 지분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시장에서 찬밥 신세다. 결국 모회사의 시가총액은 5000억원으로 쪼그라든다. 대주주 입장에선 1조원짜리 회사를 2조5000억원(모회사 5000억+자회사 2조원)으로 불려놓았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다. 하지만 A사 소액 주주는 속이 탄다. 주가가 순식간에 절반 수준으로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A회사는 유망 사업부문이 있다는 판단 아래  ‘장기투자’한 투자자는 큰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요즘 상장회사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일명 ‘쪼개기 상장’의 모습이다. 이런 상황에서 A회사에 장기 투자한 선택이 옳은 걸까.

LG화학은 배터리 사업부를 물적분할(LG에너지솔루션)한 뒤 지난달 27일 상장시켰다. 이 여파로 LG화학의 시가총액은 지난해 최고치 73조원에서 45조원(7일 기준)으로 주저앉았다. 대신 LG엔솔의 시가총액은 모회사의 3배 수준인 128조원에 달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SK케미칼은 SK바이오사이언스를, 카카오는 카카오뱅크와 카카오페이를 각각 분할시켜 상장했다. 결국 모회사의 주가는 1년 새 거의 반 토막이 났다. 그런데도 앞으로 상장기업 자회사의 상장 계획이 줄을 잇는다. 신세계그룹은 SSG닷컴의 상장을 추진하고 있다. 이마트의 온라인쇼핑몰 사업부문을 분리한 SSG닷컴은 기업가치가 모회사 이마트를 훌쩍 뛰어넘을 것으로 증권가는 내다본다. 또 SK이노베이션의 배터리 자회사인 SK온도 상장을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상장기업이 앞다퉈 자회사의 상장에 나서는 것은 투자자금을 확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계열사 덩치를 키우고 안정된 지배 구조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기업이 간과하고 있는 게 소액투자자의 이익이다. 소액투자자 입장에서는 기업이 소액투자자를 신경 쓰지 않으니 기업과 함께 커가는 ‘장기 투자’를 하지 않는다. 단기 수익을 올리고 빠지는 데 열을 올리게 된다. 이런 상황에선 시장은 항상 불안정하고 디스카운트 된다.

국민연금공단은 최근 포스코의 물적분할안에 찬성했다. LG화학 때와 다른 결정이다. 포스코홀딩스는 자회사 포스코 지분 100%를 보유하고, 포스코는 비상장 상태를 유지하기로 했다. 자회사를 상장하지 않으면 기존 주주가치가 훼손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국민연금의 찬성을 끌어낸 것으로 보인다. 쪼개기 상장의 기반이 된 법은 외환위기 때 구조조정을 쉽게 하기 위한 법 개정이었다. 이젠 금융당국의 정책도 기업의 상장 전략도 주주친화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더 이상 동학 개미를 서학 개미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