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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은 누구를 돕고 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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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승욱 정치팀장

서승욱 정치팀장

#지난해 12월이었다. ‘대한민국 대통령 내외 문재인 김정숙’ 명의의 연하장을 받았다.  “마스크와 함께 하는 생활이 두 해나 이어졌지만 국민 여러분의 협조 덕분에 우리는 일상을 회복하는 희망의 계단에 올랐습니다~.”

“대통령은 확실히 딴 세상에 살고 있다”는 야당의 논평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연하장 내용 일부는 확실히 세상 여론과 거리가 있었다. 코로나19 창궐 이후 문 대통령이 던진 예측은 번번이 빗나갔다. “긴 터널의 끝이 보입니다”(2020년 12월)가 대표적으로, ‘문재인 표 장밋빛 전망’의 대표적 오답 예로 자리 잡았다.  ‘일상 회복, 희망의 계단’ 운운한 문구 역시 연하장이 도착할 무렵엔 거의 빈말이 됐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였다.

‘적폐수사’ 논란에 대통령 참전
진영 결집? 반문 결집? 갈림길
이·윤, 어느 쪽에 득될지 미지수

코로나뿐만이 아니었다. 연하장엔 “국민의 손을 잡고 지난 다섯 해 쉼 없이 전진했다”는 내용도 담겼다. 지난 5년간 보여준 문 대통령의 인식이 다수 국민의 정서에 과연 부합했을까, 그리고 진실로 대한민국은 쉼없이 전진했을까, 모두가 의문이었다.

정권심판론이 정권재창출 여론을 압도하는 건 이런 크고 작은 실망과 의문이 쌓인 결과다. 이처럼 기울어진 운동장이 이재명 민주당 후보에겐 헤어 나오기 힘든 ‘늪’처럼 느껴질 것이다. 야당의 표현을 빌리자면 ‘딴 세상’에 사는 듯한 대통령, 이 후보에겐 그와의 차별화가 대선 승리를 위한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2019년 7월 문재인 대통령(오른쪽)이 청와대 본관 충무실에서 윤석열 신임 검찰총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2019년 7월 문재인 대통령(오른쪽)이 청와대 본관 충무실에서 윤석열 신임 검찰총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지난 1월 27일로 예정됐던 문 대통령의 신년 회견이 갑자기 취소됐다. 청와대는 “오미크론 확산 대응에 집중하기 위해서”란 이유를 댔다. 중동 순방에 동행했던 청와대 참모들의 코로나 감염 때문 아니냐는 수군거림도 있었다. 어쨌든 청와대는 화상 회견 등 ‘플랜B’에 대한 언급조차 없이 회견 취소를 일방 통보했다. 이 소식에 표정이 밝아진 쪽은 역설적이게도 이재명 캠프였다. 임기 마지막 신년 회견에선 비현실적 국정 진단과 자화자찬이 또 쏟아질 가능성이 컸다.

그 결과 정권교체론에 더 힘이 실린다면 지지율 정체에 시달리는 이 후보에겐 설 연휴 전야의 핵폭탄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전문가들 사이에도 “청와대가 기자회견 취소로 정치적 악재를 의도적으로 회피했을 가능성이 있다”(배종찬 인사이트케이연구소장)는 분석이 나왔다. 대통령의 회견 취소에 여당 캠프가 몰래 웃는 황당한 시추에이션이었다.

#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지난 7일 중앙일보 인터뷰 이후 ‘전 정권 적폐 수사’라는 회오리가 대선전을 덮쳤다. 인터뷰에 참여했던 필자에게도 지인들의 관전평이 쏟아졌다. 몸 담은 진영에 따라, 지지 후보에 따라 반응은 완전히 갈렸다. 윤 후보를 지지하는 보수진영 인사는 “적절한 시점에 절묘하게 할 말을 했다. (현 정권의 적폐를 감싸고 있는) 현재의 검찰이나 경찰에 대한 경고 메시지 같다”고 했다. 반대로 오랜만에 통화한 민주당의 정치 원로는 “중앙일보가 대단한 인터뷰를 했다”며 판세 변화의 실마리가 되길 기대했다.

이 정도의 정치권 논란은 예상했지만, 예상치 못한 변수는 문 대통령의 등장이었다. 문 대통령이 직접 “현 정부를 근거 없이 적폐 수사의 대상·불법으로 몰았다. 강력한 분노를 표하며 사과를 요구한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대통령과 야당 후보가 정면충돌하는 초유의 상황이 펼쳐졌다. ‘이재명 대 윤석열’ 구도가 ‘문재인 대 윤석열’로 바뀌었다는 말까지 나왔다.

청와대 주장대로 “가짜뉴스에 대한 대통령의 정당한 반론권 행사”인지, 야당의 비판처럼 윤 후보의 ‘적폐수사’ 공언에 위기감을 느낀 문 대통령이 ‘진영 결집’이란 승부수로 대선전 한복판에 뛰어든 것인지는 대통령 본인만 알 것이다. 어쨌든 그동안 문 대통령과의 차별화에 골몰해온 이재명 후보는 ‘노무현의 비극’까지 소환하며 진영 결집 쪽으로 태세를 전환했다.

하지만 “그대로 내버려 뒀으면 ‘적폐 수사’ 발언의 책임을 고스란히 뒤집어쓸 뻔 했던 윤 후보를 문 대통령이 살렸다”는 분석도 없지 않다. 윤 후보의 발언 시비에 문 대통령의 선거 개입 논란까지 뒤섞이며 어느 한 쪽의 잘못만 따지기 힘든 진흙탕 싸움이 돼 버렸기 때문이다. 아직 지지 후보를 결정하지 못한 부동층 내부의 ‘반 문재인’ 정서를 문 대통령 스스로 들쑤신 측면도 있다. 문 대통령의 ‘분노’가 결국 이재명, 윤석열 둘 중 누구를 돕게 될지 그 결말이 궁금하다. 안 그래도 두 진영으로 쪼개진 나라가 대통령의 참전으로 더 쪼개지게 됐다는 안타까운 현실은 별개로 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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