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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훈 아들이라 부담? 난 음악과 씨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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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정민은 “외국 여러 도시에서 자라서인지 ‘살기 좋은 곳’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오케스트라를 맡은 강릉이 “바다와 산이 둘 다 있는 좋은 도시”라고 했다. [사진 스테이지원]

정민은 “외국 여러 도시에서 자라서인지 ‘살기 좋은 곳’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오케스트라를 맡은 강릉이 “바다와 산이 둘 다 있는 좋은 도시”라고 했다. [사진 스테이지원]

“아침마다 아버지 피아노 소리에 일어나곤 했다. 아무리 일찍 일어나도 아버지의 새벽 악보 공부를 앞서지 못했다. 이제는 나도 새벽에 악보를 본다. 최근 ‘악보 공부 지겹지 않냐’고 아버지에게 물어봤더니 글쎄 ‘아주 많이 지겹다’ 하시더라.”

지휘자 정민(38)의 아버지는 정명훈(69)이다. 세 아들 중 막내다. 강릉시립교향악단 상임 지휘자 임기(2년)를 올해 시작했다. 서울대 음대에서 더블베이스와 바이올린을 전공한 그는 2007년 부산 소년의집 알로이시오 오케스트라를 통해 데뷔했고, 2015년 도쿄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부지휘자로 취임했다.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그는 “지휘자가 꼭 돼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아버지는 내 진로에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나 혼자 악기를 바꿔가며 음악을 했다. 음악의 힘에 끌려 이렇게 왔다”고 했다.

정명훈

정명훈

정민은 정명훈이 1984년 독일 자르브뤼켄 방송교향악단의 수석 지휘자를 맡았을 때 자르브뤼켄에서 태어났다. 89년 바스티유 오페라단 음악감독이 된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갔다. 산타 체칠리아 아카데미 오케스트라의 수석 지휘자였던 아버지와 로마에서도 살았다. 오케스트라가 그의 일상이었을까. 그는 “꼭 그렇지는 않다”며 “남들보다 오케스트라 공연과 리허설을 더 많이 보며 자라긴 했지만, 지휘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안 했다. 부모님도 뭐가 되라고 이야기한 적이 없다”고 했다.

첫 악기는 일렉트릭 베이스였다. “둘째 형이 기타를 치길래 같이 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다 오케스트라의 더블베이스에 관심이 생겨 배웠다.” 그다음은 바이올린이었다. “하루는 정경화 고모가 아버지와 브람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했다. 음악이 참 좋았는데, 브람스가 더블베이스 협주곡은 쓰지 않았다는 게 답답했다. 그날로 악기사를 찾아가 100달러에 바이올린, 활, 케이스, 송진까지 샀다.”

정민은 아버지를 두고 “음악은 자주 이야기하지만, 지휘 테크닉 같은 건 전혀 가르쳐주지 않는 분”이라고 했다. 실전을 통해 배웠다. 그간 일본·이탈리아·러시아 등에서 심포니와 오페라 무대에 섰던 그는 “미안하게도 오케스트라를 고생시키며 배웠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실수로 너무 창피해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며 지휘를 익혔다”는 그는 “(실전은) 오케스트라가 없으면 연습할 수도 없는 지휘자가 배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덧붙였다.

무대가 어려워도 환희는 충분하다. “10살도 안 됐을 때 아버지가 이탈리아 시에나에서 베토벤 교향곡 5번을 연주했는데 귀가 확 열렸다. 도대체 어떤 소리가 이럴 수 있는지 놀랐다.” 지휘자로서 정민은 고(故) 버나드 하이팅크 말을 믿는다. “세계 일류 교향악단을 다 지휘한 그는 90세가 돼서도 베토벤 9번 교향곡 1악장을 잘 모르겠다고 했다. 끝이 없는 세계다.” 아버지 말도 기억한다. “모든 연주가 오디션이라고 했다. 아무리 유명해도 소용없다. 그날 제대로 못 하면 오디션에서 떨어진 사람과 다름없다.”

‘누구의 아들’이라는 게 정민에게 어떤 의미일까. 그는 “그게 억울하면 다른 일을 해야 한다”는 농담으로 답을 시작했다. “아버지 때문에 특별히 더 부담되지는 않는다. 음악 자체의 부담감이 이미 너무 컸다.” 그는 비유 하나를 들었다. “마이클 조던 아들이 농구를 했다더라. 그거야말로 부담되겠다고 생각했다. 누가 골을 많이 넣는지, 바로 비교되지 않나.” 음악은 그렇지 않다는 뜻이다. “나를 ‘정명훈 아들’로 봐도 되고, 안 그래도 된다. 나는 음악하고만 씨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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