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무밭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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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무밭에서'- 이상국(1946~ )

무는 제 몸이 집이다

안방이고 변소다

저들이 울타리나 문패도 없이

흙 속에 실오라기 같은 뿌리를 내리고

조금씩 조금씩 생을 늘리는 동안

그래도 뭔가 믿는 데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자신을 완성해 가다가

어느 날 농부의 손에 뽑혀나갈 때

저들은 순순히 따라 나갔을까, 아니면

흙을 붙잡고 안간힘을 썼을까

무밭을 지나다가

군데군데 솎여 나간 자리를 보면

아직 그들의 체온이 남아 있는 것 같아

손을 넣어보고 싶다



날씨 칼칼해지도록 무밭 배추밭은 시퍼렇게 대견합니다. 난 무밭 배추밭이 왜 그렇게 예쁜지 꽃구경은 몰라도 일부러 고랭지 채소밭 구경 가고 싶을 때 있습니다. 가난의 유전 때문인가? 민틋한 무 하나 뽑아 보면 놀랍게도 실뿌리 서너 개가 전부입니다. 상근기의 수행인 듯. 어석어석 무 씹으며 시 낭송 같은 걸 하면 어떨까요. 무 뽑혀 나온 자리 생각하면서. 울음이 나올까요?

<장석남.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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