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父 친구에 성폭행 당한 그녀…서양 최초 여화가의 슬픈 그림 [더오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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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손민원의 성인권이야기(54)

10년 전 여행사 패키지 상품으로 프랑스 여행을 갔다. 당연히 들러야 할 곳 중 하나가 파리에 있는 루브르 박물관이었다. 수천 점의 예술작품을 단 몇 시간 안에 둘러본다는 것은 애당초 잘못된 계획이었지만 교과서에서나 보았던 유명한 그림들을 실제 내 눈으로 본다는 것은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수많은 인파 앞에 떡하니 놓인 모나리자, 승리의 여신 ‘니케상’, ‘밀로의 비너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그런데 그림에 대해 무지했던 나는 아쉽게도 그저 쇼핑몰의 비싼 물건을 보듯이 지나쳤다.

내가 얼마나 무지한 미술관 관람을 하고 온 것인지, 그림도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이후 그림과 관련된 책을 틈틈이 읽다 보니 이제 20권 남짓 책꽂이에 꽂혀 있다. 강의가 뜸한 요즘, 그림을 보고 그와 관련된 이야기도 찾아본다.

밀레의 만종.

밀레의 만종.

우리 모두가 다 아는 밀레의 ‘만종’을 고요히 들여다보면 멀리 그림 속 교회당에서 땡땡 종이 울릴 것 같다. 종소리를 듣고 분주히 일하던 부부는 일손을 멈추고 하느님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감사와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한다. (느낌은 사람마다 다르게 느끼겠지만 )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내 마음까지 경건해진다. 또 밀레의 ‘이삭줍기’란 작품을 보고 있다 보면 뉘엿뉘엿 지는 노을 아래 가난한 여인들 셋이 한 톨의 밀이삭이라도 더 주워 담고자 하는 간절함이 느껴진다. 아마도 이 여인들은 빨리 집에 가서 이 밀로 배고파하는 아이들에게 맛있는 저녁을 차려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면서 이들 삶의 고단함을 짐작한다. 이삭을 줍는 여인들 뒤로 이와 대비해 쓰러질 듯 높이 곡식더미를 쌓아올린 마차가 눈에 들어온다. 한편에는 빈 들판의 이삭을 줍고, 다른 한쪽에는 넘치는 풍요로움이 있다니….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생각하게 한다. 이렇게 한 폭의 그림과 작품을 고요히 들여다보고 있다 보면 그림과 나는 수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다. 그림은 그 시대의 역사와 사회상이 드러나 있기도 하고, 평온함을 느끼게도 하며, 때론 위안을 주기도 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또 견물생심이라고 책이 아니라 실제 미술관에 가서 그 그림들을 다시 제대로 마주하고 싶은 욕구도 새삼 커지기도 한다.

그런데 서양미술에 관한 책을 보다 보면 “왜 이 위대한 미술가는 대부분 남성인가? 또 벗겨진 여성의 나체가 유난히 많은 것은 왜일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세상이 인정한 예술가인 미켈란젤로, 반 고흐, 피카소, 렘브란트, 세잔, 마티스…. 이들 슈퍼스타는 공통적으로 서구의 백인 남성이라는 것이다. 그럼 이들 대가에 견줄 만한 여성 미술가, 아니 미술가에 국한하지 않고 음악가, 과학자가 있다면 상기해 보기 바란다. 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아예 타고난 재능이 없는 것일까?

몇 되지 않는 여성 미술가의 삶의 경험과 같은 주제의 남성 그림이 어떻게 다르게 묘사됐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아주 흥미로운 것이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1597~1651·이탈리아)는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최초의 여성 화가라 할 수 있다. 대부분의 그녀 작품은 성폭력과 관련된 끔찍한 복수와 연관돼 있다. 그녀는 그림을 통해 계속해서 “It’s true! It’s true!”라고 외치는 듯하다. 그녀의 간절한 이 외침은 왜일까?

여기엔 아버지 친구로부터 강간당하는 가슴 아픈 사연이 숨어 있다. 젠틸레스키의 아버지는 일찍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던 딸의 재능을 키우기 위해 동료 화가인 타시에게 그림 지도를 부탁한다. 그런데 아내가 있던 타시는 젠틸레스키를 속이고 강간한다. 이를 알고 분노한 젠틸레스키의 아버지는 타시를 고발해 7개월간의 긴 재판이 이어진다. 그런데 재판 과정에서 고문을 당한 것은 타시가 아니라 젠틸레스키였다. 젠틸레스키는 스스로가 자신이 처녀였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젠틸레스키는 끔찍한 고문을 받으며 “It’s true!”라며 자신이 죄가 없음을 수없이 반복해야 했다. 결국 타시가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젠틸레스키는 로마에서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는 더러운 비난의 대상이 됐고, 그 도시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그림은 사무치는 복수심에 불타는 그림으로 표현된 것이다. 400년 전에 살았던 젠틸레스키에게 비수처럼 꽂힌 성폭력의 상처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의 사정과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작품은 대부분 성경의 내용을 소재로 하고 있다. 첫 번째 작품은 그녀가 17세에 그린 ‘수산나와 장로들’이다. 이 작품은 다니엘서의 외경에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하는데, 혼자 목욕하는 수산나에게 음욕을 품은 두 장로가 수산나를 겁탈하기 위해 작당해 모의하는 성서의 이야기가 그 소재다. 수산나와 요아킴은 유대인 부부다. 유명 인사인 남편 요아킴을 만나려고 수난나의 집은 손님이 많았다. 그중에 두 명의 유대인 장로는 아름다운 수산나를 탐하려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손님들 모두가 돌아가고 수산나가 정원에서 목욕하는 장면을 보게 된다. 두 노인은 수산나에게 다가가 성관계를 요구했고, 만일 거절한다면 젊은 남자와 놀아나는 것을 보았노라고 고발하겠다면서 협박한다. 수산나는 협박을 거절하고 억울하게 사형선고를 받게 된다. 이때 수산나의 간절한 기도로 다니엘은 지혜를 주었고, 다니엘의 기지로 수산나는 누명을 벗게 된다.

이 성경의 소재는 젠틸레스키 외에도 수많은 화가의 그림 소재가 됐다. 그렇다면 서양 최초의 여성 화가가 그린 ‘수산나와 장로들’과 렘브란트, 루벤스, 틴토레토 혹은 다른 여러 작가에 의해 그려진 ‘수산나와 장로들’은 어떻게 다를까?

'수산나와 두 장로'. 1610년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17세 때 그린 작품. 포머스펠덴의 쇠보른 가 소장.

'수산나와 두 장로'. 1610년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17세 때 그린 작품. 포머스펠덴의 쇠보른 가 소장.

남성 화가의 ‘수산나와 장로들’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보고 있노라면 성경 속 등장인물인 수산나를 빙자해 작품이라는 이름으로 관음적 욕구를 채우고 있다는 느낌을 떨치기 어렵다 (사람마다 느낌이 다를 수도 있지만). 거기에다 수산나를 탐하는 탐욕스러운 장로들의 범죄행위까지 스릴 있게 같이 보고 있는 느낌이다. 그러나 젠틸레스키의 수산나를 보면 벗고 있지만 나체의 몸을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고개를 돌리고 진저리치며 협박하는 두 장로에 대한 불쾌감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주체가 느껴진다.

왜 명화 속에 벗은 여성이 많이 등장하는가? 책을 읽을수록 그 의문에 대한 답은 명확해진다. 명화 속에는 수산나와 같이 성서 속 인물 혹은 비너스와 같은 신을 등장시키면서 끝없이 여성의 벗겨진 모습을 등장시켜 왔다는 것이다.

예술가를 양성하는 기본적 필수 훈련 중 누드모델을 앞에 두고 인체를 드로잉하는 학습은 필수과정이었다고 하지만 여학생에게는 절대 접근할 수 없는 학습이었다. 불과 100년 전까지도 여성의 삶은 미술계뿐 아니라 거의 모든 면에서 무자비하게 닫혀 있던 사회라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위대한 여성 예술가의 이름이 선뜻 떠오르지 않은 이유는 여성의 대부분은 심리적·사회적으로 재능을 키울 기회조차 허락되지 않는 사회 구조 때문일 것이다. 사회의 제도적 구조 자체가 소속된 인간들에게 어떤 요구를 하고 배제하는지에 따라 그 영향은 ‘화가’가 아닌 ‘여류 화가’라는 특별한 사람을 호칭하는 단어가 나오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적어도 보여지는 세상은 많이 변화해 더 이상 여성이 ‘가정의 천사’가 돼야 한다고 요구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재주를 지닌 여성을 호명하지 않는 사회 구조가 있었다면 지금 사회는 재능을 사장하게 하는 불평등 사회 구조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 가난하면 꿈도 가난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반짝이는 슈퍼 재주가 있다면 그 능력을 펼쳐내도록 돕고 지지하는 사회제도와 교육이 절실하다. 볕이 들지 않는 곳에 빛을 비추고자 하는 진정성 있는 지도자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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