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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가로등이 하나둘씩…오후 5시에 하는 산책 맛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전명원의 일상의 발견(22)

어딜 가든지 아침 일찍 갔다. 명품 사겠다고 오픈런하는 것도 아니면서 백화점에도 문 열자마자 들어갔고, 점심 약속은 무조건 식당 오픈 시간에 맞춰 잡았다. 이렇게 늘 무얼 해도 아침 일찍 시작하는 사람에게 오후란, 돌아오는 시간이고 마무리하는 시간이지 시작하는 시간은 아니었다.

오후 다섯 시가 다 되어서야 산책을 하러 집을 나섰다. 출근하는 삶을 살던 전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나의 동네 산책코스는 보통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을 넘지 않는다. 거의 같은 길을 산책한다. 산책의 즐거움을 알게 된 초기에는 이리저리 열심히 코스를 바꾸어 보았는데 늘 같은, 지금의 코스를 걸을 때 가장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 항상 같은 길을 걷지만 한 번도 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길의 풍경은 늘 바뀌었고, 길을 걷는 나의 생각도 총천연색으로 다양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곧 해가 저물어올 시간에 산책을 나선 일은 거의 없는 듯하다. 걷는 동안 하늘이 조금씩 그 색을 바꾸고 있었다. 붉게 노을이 물들었고, 보라색에 가까운 빛으로 서서히 바뀌는 것을 보았다. 나의 산책 코스는 대로를 사이에 두고 타원형으로 도는 형태인데, 그렇다 보니 같은 도로를 사이에 두고 갈 때와 올 때가 사뭇 다르다. 같은 도로변인데도 방향만 바뀌면 또다시 새로운 기분이 드는 것이다. 오늘은 방향뿐 아니라 시간의 흐름도 느껴졌다. 해가 조금씩 저물고 있었으므로, 가는 길과 오는 길의 하늘색이 달랐고, 어두워지는 빛의 색감이 달랐기 때문이다.

해가 저물어왔다. 하늘이 붉게 물들고, 보랏빛으로 바뀌며, 어두운 푸른빛이 감돌 즈음 가로등에 불이 켜졌다. [사진 전명원]

해가 저물어왔다. 하늘이 붉게 물들고, 보랏빛으로 바뀌며, 어두운 푸른빛이 감돌 즈음 가로등에 불이 켜졌다. [사진 전명원]

집이 점차 가까워오면서, 주변도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어둠이 섞인 푸른빛이었다. 느긋하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 걷고 있을 즈음 갑자기 눈앞이 ‘반짝’ 했다. 뭐지? 멈추어 서서 눈앞을 보았을 때, 가로등이 빛나고 있었다. 점차 사위가 어두워지기 시작했으므로 길가의 가로등이 점등되는 순간이었다.

주변 빛이 아직 남아있을 때 가로등은 반짝일 뿐이었지만, 곧 어둠이 내려오자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걷다 말고 가로등을 한참 바라보았다.

해가 뜨고, 머리 위에 태양이 있었다. 하루 종일 햇살이 좋아 거실 안쪽까지 깊숙이 볕이 들어오는 날이었다. 해가 저물어왔다. 하늘이 붉게 물들고, 보랏빛으로 바뀌며, 어두운 푸른빛이 감돌 즈음 가로등에 불이 켜졌다. 집에 도착했을 즈음엔 이미 해가 지고 어두워졌지만 밤새 가로등은 빛을 낼 것이었다. 길을 밝히고, 주변의 나무와 풀들을 밝히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비추겠지. 다시 해가 떠오른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밤은 다시 밝게 빛나는 가로등으로 인해 또 한 번의 빛을 맞이하는 것이다.

내 인생의 가로등이 켜지는 순간을 생각했다. 해가 저물었지만 아직 오늘이 끝난 것은 아니다. 남은 밤은 가로등 빛에 의지해 빛날 것이다. 내일 새벽이 오기 전까지 길을 비추어줄 가로등이 있으니 이 밤, 좀 더 멀리까지 걸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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