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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3시간에 만원…나무향기 가득한 숲속 나만의 서재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전명원의 일상의 발견(19)

책뜰 예약은 쉽지 않았다. 책뜰은 수원시 광교의 푸른숲 도서관에 딸린 시설이다. 도서관 이용과 별개로 숲속 개인실을 오전 또는 오후, 세 시간에 만원의 별도 이용료를 내고 이용할 수 있다. 매월 1일에 다음 달의 예약을 받는데 경쟁이 치열하므로 중간에 취소 자리가 나야만 한다. 몇 번 홈페이지를 들락거리다 운 좋게 취소 자리가 떴다. 바로 다음 날 평일 오후 시간 자리가 딱 하나였다.

은퇴하고 나니 좋은 점이 꽤 많다고 생각하는, 나름대로 은퇴가 적성에 맞는 사람이라 여기는 사람이지만 잠시 망설였다. ‘오후 두 시에서 다섯 시면 애매한데’, ‘오전이 좋은데’ 하다가 이내 생각했다. ‘나는 이제 더는 오후에 출근하지 않잖아, 뭘 망설이는 거지?’ 그렇게 망설임을 거두고 무조건 신청했다.

어려서부터의 습관이 완벽히 없어지지는 않지만, 이제 적당한 시간을 즐기는 여유도 조금은 알게 되었다. [사진 전명원]

어려서부터의 습관이 완벽히 없어지지는 않지만, 이제 적당한 시간을 즐기는 여유도 조금은 알게 되었다. [사진 전명원]

다음 날 아침에 비가 많이 왔다. 아침이 저녁처럼 어둡고, 빗방울이 유리창을 계속 두드렸다. 어려서부터 우리 집 식구들은 뭘 하든 아침 일찍 움직였다. 어딜 가도 일찍 갔다. 쇼핑몰은 오픈과 동시에 들어갔고, 점심 무렵이 되면 하루가 다 간 듯해 그 시간에 어딜 나서거나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오후는 돌아오는 시간이지 나서는 시간이 아니었다.

내가 어른이 되어 가진 직업은 오후에 출근하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여전히 뭐든 오전 일찍 시작해 출근 전에 끝내야 했다. 그것이 쇼핑이든, 약속이든 항상 그랬다. 은퇴하고 나니 오전에도, 오후에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 오랫동안 그런 삶을 꿈꾸고 원했으면서도 막상 많아진 시간에 적응하는 데엔 또 다른 시간이 필요했다. 습관이란 참 무섭다는 말이 맞았다. 운동도 일어나자마자 일찍 아이들 등굣길에 섞여 나서곤 했다. 오전에 비가 오다 오후에 날이 개면 망설였다. ‘벌써 오후인데, 하루가 다 갔는데 지금 나가긴 좀 그렇지 않나’하고 말이다.

어려서부터의 습관이 완벽하게 없어지진 않는다. 없어지는 것이 다 좋은 것도 아니다. 다만 이제 적당히 시간을 즐기는 여유를 조금 더 알게 된 듯하다. 물론 즐기기 전 살짝 망설임의 시간이 없지는 않다, 아직도.

전날 예약 버튼을 클릭하며 잠시 망설였던 것은 잊고, 집에서 나와 천천히 도서관까지 걸었다. 오전 내내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그쳤지만, 잔뜩 흐려 개이지 않은 바람 속에 습기가 가득했다. 집에서 6000보를 걸어가는 동안, 습기는 마스크의 안과 밖에 들러붙었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이 열어둔 창으로 들어왔다. 그 안에서 미뤄둔 책들을 꺼내 느긋하게 읽었다. 흐르는 세 시간이 아니라, 멈춘 세 시간처럼 느껴졌다. [사진 전명원]

물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이 열어둔 창으로 들어왔다. 그 안에서 미뤄둔 책들을 꺼내 느긋하게 읽었다. 흐르는 세 시간이 아니라, 멈춘 세 시간처럼 느껴졌다. [사진 전명원]

그렇게 걸어서 푸른숲 도서관에 도착했고, 내가 예약한 산수국 방의 열쇠를 받아 들고 문을 열었다. 나무 향기가 가득한 삼면이 통유리인 방에 들어섰을 때의 그 기분이 아직도 그대로 있다. 세 시간 동안 나만의 서재. 집에서도 내 서재는 따로 있지만, 집안에 속한 한 부분으로의 서재와 숲속에 다람쥐 집처럼 하나씩 독립된 공간이 주는 느낌은 사뭇 달랐다.

까치가 날아와 난간에 앉았다. 물기를 잔뜩 머금은 바람이 열어둔 창으로 들어왔다. 뒷산에서, 이름 모를 새들이 울었다. 날씨가 조금씩 조금씩 개어가는 하늘이 보였다.

사놓고도 미뤄두었던 책들을 꺼내어 세 시간을 꽉 채워 느긋하게 읽었다. 흐르는 세 시간이 아니라, 멈춘 세 시간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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