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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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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최현주 기자 중앙일보 기자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최현주 생활경제팀 기자

한때 중·고교 교과 과정에 교련이라는 과목이 있었다. 중장년층뿐 아니라 MZ세대의 한 축인 밀레니얼 세대(1980년대 초~2000년대 초 출생)의 끝자락에 있는 이들도 어슴푸레 기억이 남아 있을 거다.

교련 시간에 남학생들은 학교 운동장에서 모여 군인이 받는 훈련 중 하나인 제식훈련을 했다. 여학생은 간단한 응급처치·붕대법·간호법 등을 배웠다. 이는 수행평가(옛 실기평가)에 점수로 반영됐다. 1997년에서야 교련은 필수과목이 아닌 선택과목으로 바뀌면서 사실상 사라졌다.

짝꿍 머리에 붕대를 감던 오래전 기억이 되살아난 건 때아닌 멸공(滅共) 논란을 지켜보면서다. 논란의 태동은 지난해 11월.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인스타그램에 빨간 모자·지갑을 든 지인과 함께 찍은 사진을 게재했다. “뭔가 공산당 같은 느낌인데 오해 마시기 바란다”는 글을 함께 올리며 해시태그(특정 검색어 지정)로 ‘#멸공’을 달았다. 논란에 불이 붙은 것은 인스타그램이 최근 정 부회장의 글을 삭제하면서다. 숙취해소제 사진과 함께 “끝까지 살아남을 테다. #멸공”이라고 쓴 게시물이다. 이유는 ‘신체적 폭력 및 선동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정 부회장은 ‘농담’을 한 것인데, 인스타그램은 이를 ‘선동’으로 봤다. 그런데 석연찮다. 인스타그램에서 ‘멸공’을 검색하면 수천개의 게시물이 나온다. 유독 정 부회장의 특정 글만 삭제됐다. 심지어 정 부회장이 공식적으로 반발하자 하루 만에 ‘시스템 오류’였다며 삭제했던 게시물도 복구했다. 삭제에 대한 확실한 기준도 없어 보인다. ‘플랫폼 검열’ 의구심을 거둘 수 없는 모양새다.

멸공 논란은 정치권까지 퍼지고 있다. 대통령 후보가 이마트에서 멸치와 콩을 사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게재하더니 야당 의원들이 줄줄이 이마트에서 멸치·콩을 사는 모습을 게재하며 ‘SNS 챌린지’에 나섰다. 여당 측은 “21세기에 멸공이라는 글을 올리는 재벌 회장이 있다”며 비난하고, 야당 측은 “‘공산당이 싫어요’가 논란이 되는 나라는 공산주의밖에 없다”며 맞서고 있다.

짝꿍 머리에 붕대 감는 시험을 보던 그때도, 지금도 한국은 분단국가다. 그런데 대선이 코앞인 지금 걱정은 공산당보다 정보를 자체 검열하는 플랫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