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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탈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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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이경희 기자 중앙일보 P디렉터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이경희 이노베이션랩장

풍성한 머리숱에 대한 동경은 고대에도 있었나 보다. BC 16세기 고대 이집트 의학서 『에베르스 파피루스』에는 11가지 탈모 치료제 제조법이 담겨 있다. 기름에 절인 고슴도치 가시를 태운 재, 손톱 부스러기, 꿀·석고·석간주(산화철이 포함된 붉은 흙) 혼합액을 잘 섞어 바른다는 식이다. 허준의 『동의보감』에도 갑자기 털이 다 빠져버린 젊은 남자에게 ‘육미지황환’을 썼더니 머리가 1치(약 3㎝) 자랐다는 치료 사례가 나온다.

 의료 사회학자 피터 콘래드가 쓴  『어쩌다 우리는 환자가 되었나』에 따르면 19세기 후반까지도 의학계에선 탈모에 신경 쓰지 않았다. 탈모 치료법은 의술이라기보다 연금술이나 미신에 가까웠고, 딱히 효과도 없었기 때문이다. 몇몇 의사들이 시도한 치료법도 오십보백보였다. 두피에 일부러 물집을 내거나, 고무 모자를 씌워 혈액 순환을 돕는 요법 등이다. 1980년대 이후 미녹시딜 등 효과 있는 치료제가 등장하면서 탈모는 비로소 의료 영역에 편입됐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탈모 치료제 건강보험 적용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1000만 탈모인’의 표심을 자극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원형탈모증, 지루성 탈모 등 병적인 탈모는 지금도 건강보험 급여 대상이다. 가령 원형탈모증에는 스테로이드제·자가면역치료제 등을 동원하지만, 아직 확실한 치료 약은 없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탈모로 진료받은 환자 수는 2016년 21만여 명에서 2020년 23만여 명으로 증가했다.

 반면 호르몬·유전 탓이 큰 남성형 탈모는 ‘미용 목적’이라 보아 건강보험을 적용해주지 않는다. 프로페시아·아보다트 등의 남성형 탈모 치료제는 초기에 투약하면 진행을 막을 수 있다. 투약을 중단하면 다시 머리털이 빠지므로 탈모에 저항하는 한 약을 끊을 수 없다. 탈모인에겐 부담이고, 제약사 입장에선 효자 상품이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그랜드 뷰 리서치는 2020년 약 9조원 규모였던 전 세계 탈모 치료제 시장이 2028년이면 18조원 규모로 성장하리라고 내다본다. 피터 콘래드는 이러한 산업적 배경 탓에 자연스러운 노화 과정인 탈모까지 치료해야 할 질병에 편입됐다고 꼬집는다. 사회적 비용을 줄이려면 탈모를 보는 시선을 바꿔야겠지만, 그 어려운 길을 갈 정치인은 없을 듯하다.

참고 도서
『머리카락의 기쁨과 슬픔』(부운주 지음, 동녘)
『어쩌다 우리는 환자가 되었나』(피터 콘래드 지음, 후마니타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