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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황혼육아, 자식 키울 때 느끼지 못한 기쁨 있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조남대의 은퇴일기(32)

아내는 6살 손녀와 4살 손자를 돌보고 있다. 나도 아침, 저녁 하원 시간에 아내와 함께 손주들을 챙겨준다. 이런 과정에서 아내는 젊은 엄마들과 어울려 큰 언니처럼 지내고 있으며, 나도 덩달아 황혼 육아하는 사람과 친하게 지내고 있다.

아침에 딸네 집에 도착해 자는 손주들을 깨우면 온갖 핑계와 트집을 잡아 꾸물거리기 때문에 밥 먹이고 옷을 입혀 데리고 나가는 것도 여간 어렵지 않다. 겨우 집을 나서면 아파트 놀이터에서 친구들과 그네나 미끄럼틀을 타며 한바탕 놀고 난 다음에야 집 앞으로 오는 유치원 버스에 몸을 싣는다.

손자는 같이 놀던 친구들이 어린이집에 간다며 하나둘 놀이터를 떠나야만 마지못해 발걸음을 옮긴다. 느릿느릿 걸어가는 네 살 손자를 보노라면 집에서 마음 놓고 놀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지만 그럴 수도 없어 애처롭기 그지없다. 어린이집에 도착해 선생님 손을 잡고 웃으며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면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이제부터는 내 일을 할 수 있고 육아로부터 해방됐다는 것이 이렇게 가뿐할 줄이야.

손주들과 시소를 타며 함께 놀아주는 할아버지. [사진 조남대]

손주들과 시소를 타며 함께 놀아주는 할아버지. [사진 조남대]

은퇴하거나 나이 들어 이제 좀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려고 하는데 황혼 육아로 어려움을 겪는 사례가 많은 것 같다. 손자의 어린이집 같은 반 여자 친구도 근방에 사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데려다주는데, 아침마다 만나다 보니 서로 낯이 익어 어린이집에 데려다준 다음 바로 앞에 있는 커피숍에서 만났다. 아직 은퇴하지 않았지만, 건강도 좋지 않은데 손녀 육아의 한 부분을 맡아 힘은 들지만, 자식 키울 때 느끼지 못한 기쁨을 맛본단다. 이웃에 있어 자주 만나는 데다 공통의 화제가 있다 보니 금방 친해졌다. 아내의 친구 부부는 김포에서 서울의 아파트에 사는 손녀를 돌보기 위해 월요일에 딸네 집으로 와서 돌보다 금요일 저녁에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손주를 돌보다 보니 주위의 젊은 부부들이 아이를 갖고 싶어도 마음 놓고 돌봐줄 사람이 없어 갖지 못한다는 말이 이해된다. 또 첫째 키우는 것이 힘들어 둘째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고 한다. 정부는 출산율이 세계 최저라고 걱정할 것이 아니라, 맞벌이 부부가 아이를 낳으면 경력단절 없이 마음 놓고 직장에 다닐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는 것이 피부로 느껴진다.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또래의 아이들. [사진 조남대]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고 있는 또래의 아이들. [사진 조남대]

오후 4시 아이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올 때쯤이면 아파트 놀이터는 왁자지껄하다. 한쪽 등나무 아래 벤치에는 엄마와 할머니들이 모여 앉아 아이 키우는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밥을 안 먹으려고 해서 걱정이다”, “아침에 깨우기가 힘들다”, 또는 “네 살인데도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등 육아의 어려움을 쏟아낸다. 서로 겪고 있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해결책을 찾기도 한다.

남자아이들은 킥보드를 타거나 놀이터를 뛰어다니다 뒹굴기도 하고 신나면 양말을 벗어 던지고 흙장난을 친다. 기어 다니는 개미를 잡아 경주시키기도 하고 다리를 부러뜨리거나 심지어는 발로 밟아 죽이기도 하고, 넘치는 활기를 주체하지 못해 다투기도 한다. 여자아이들은 그네나 시소를 타거나 소꿉놀이를 하며 잘 놀다가도 금방 삐쳐서 울기도 한다.

엄마나 할머니들은 아이들이 노는 틈틈이 간식을 가져와 나누어 준다. 아이스크림이나 과자를 사 오더라도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하나씩 돌아갈 수 있도록 충분히 가져온다. 다음 날에는 다른 어머니가 간식을 챙겨 오기 때문에 어떤 날은 간식으로 배가 불러 저녁 숟가락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해질 녘이 되어도 노는데 빠져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떼를 쓴다. 어떤 날은 너무 심하게 놀아 집에 들어오면 땀범벅이 된 몸으로 씻지도 않고 꾸벅꾸벅 졸면서 밥을 먹다가 잠들어 버리기도 한다. 이런 손주의 상태를 파악하고 잘 대처해야 유능한 돌봄이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되는 것 같다. 자식 키울 때보다 더 조심스럽고 또 자식들 눈치가 보일 때도 있다.

놀이터에서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사진 조남대]

놀이터에서 어머니와 할머니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사진 조남대]

아내는 이웃의 엄마들과 카톡방을 만들어 정보를 주고받기도 하고, 아이들을 등원시킨 다음 점심을 같이 먹기도 한다. 주변 산을 산책하기도 하고 커피를 마시며 워킹맘인 딸을 대신해 큰언니 노릇하며 함께 어울린다.

요즈음 인기 있는 ‘카봇’이라는 장난감을 한 아이가 가지고 놀면 다른 집 아이들도 사 달라고 조른다. 그러면 젊은 엄마는 구매를 원하는 아이들의 장난감 종류와 수량을 확인하고 인터넷을 검색하여 저렴하게 공동구매한다. 어떤 엄마는 전통시장을 갔더니 싸고 맛있는 것이 있다고 카톡방에 올리면 함께 사기도 하고, 지방 여행 가서 유명 빵집에 들르면 여유 있게 사서 집집이 돌리기도 한다.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있는 여자 아이들. [사진 조남대]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있는 여자 아이들. [사진 조남대]

얼마 전에는 다른 곳에서 이사 와서 낯이 설은 할머니가 갑자기 손자가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한다며 손녀를 좀 돌봐달라고 하자 이웃에서 돌아가며 보살펴주어 한시름 놓기도 했다고 한다.

아내의 마당발 덕분에 우리 딸도 손주 친구의 엄마들과 친해져 주말 저녁에는 자녀들을 재워 놓고 한 집에 모여 포도주를 마시며 밤이 이슥하도록 놀기도 한다. 며칠 전에는 초인종이 울려 대문을 열어 보니 위층에 사는 손녀 친구가 동생과 함께 엄마 심부름으로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김치전을 한판 가져왔다. 또 시골에 계시는 친정어머니가 김치를 보내왔다며 이웃에 몇 포기씩 나눠 주기도 한다. 도심 아파트에서 돌담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훈훈한 시골 정취가 느껴진다.

손주들을 돌보면서 비슷한 형편의 조부모를 만나 친해지기도 하고, 아내는 젊은 엄마들과 어울리며 육아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기도 한다. 자식 키울 때는 맞벌이하며 육아 경험도 없는 상태에서 정신없이 키우다 보니 후회스러운 점도 없지 않았다. 이제 여유 있게 손주들을 돌보자 어떻게 해야 할지 그림이 그려진다. 손주들이 좋아하는 ‘뽀로로’나 ‘카봇’ 같은 장난감 이름도 익히고, 많이 웃고 손주 눈높이에 맞춰 놀아주는 인자한 할아버지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나중에 손주들이 커서 ‘조부모의 보살핌으로 인성이 올곧게 자랐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면 더는 바람이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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