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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아침상 차려주는 아내의 생일, 왜 이리 빨리 돌아올까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조남대의 은퇴일기(30)

아내의 생일만 다가오면 챙겨야 할 것이 많아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선물에 축하편지뿐 아니라, 미역국과 잡채가 포함된 아침상을 차려야 하기 때문이다. 일 년에 한 번뿐인데도 이러한데 평생 밥상을 차리는 아내는 얼마나 고생이 많았을까? 아내의 수고스러움에 대한 연민의 정과 고마운 마음이 새록새록 돋아 나온다.

몇 년 전부터 아내의 생일날은 내가 미역국을 끓여 주는 것이 관례처럼 되었다. 매일 식사를 챙겨주는 아내가 생일날 아침 한 끼만이라도 남편이 해주는 밥과 미역국을 먹고 싶다고 했는데, 어렵지 않을 것 같아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그런데 막상 하려니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밥과 미역국을 끓이고 기본 반찬이 있다 하여도 최소한 잡채 한 가지는 있어야 생일상 받는 기분이 날 것 같았다.

첫해는 미역국에 돼지고기를 넣어 핀잔을 듣기도 했다. 인터넷에서 미역국 끓이는 요령을 찾아보면 소고기를 볶다가 불린 미역을 넣은 다음 간장으로 간을 맞추고 끓이면 되는데 어렴풋이 보아온 대로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아내의 생일날이 되면 평생 밥상을 차려준 아내의 수고스러움에 대한 연민의 정과 고마운 마음이 새록새록 돋아 나온다. [사진 pixabay]

아내의 생일날이 되면 평생 밥상을 차려준 아내의 수고스러움에 대한 연민의 정과 고마운 마음이 새록새록 돋아 나온다. [사진 pixabay]

그러나 잡채는 준비해야 할 재료가 많다. 당면을 삶고 당근과 양파를 썰어 볶고 시금치를 데치고 잘 버무려서 맛을 내야 한다. 너무 복잡해 혼자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가까이 있는 딸의 도움으로 미역국에 잡채를 준비하고 김치와 김을 기본 반찬으로 아침을 차렸다. 맛이 별로였을 텐데도 아내는 맛있다며 잘 먹는다. 맛이 없다고 하면 내년부터는 안 하겠다고 할 것 같으니 마지 못해 그러는 것 같았다.

지난해에는 사위가 재료 준비부터 요리까지 슬그머니 도와주어 무사히 생일 아침상을 차렸다. 얼마나 고맙던지. 사위 덕분에 또 일 년을 무사히 넘겼다. 요즈음 젊은 아빠들은 요리도 잘한다. 한 세대 앞서 살았으니 다행이지, 지금 같았으면 도저히 배겨내지 못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아내는 생일이 들어간 달이 시작되면 얼마 후 생일이라고 가족들에게 소문을 낸다. 달력에 붉은 펜으로 크게 동그라미를 쳐 놓고 ‘왕비님 생신’이라고 써 놓기까지 한다. 나는 그때부터 서서히 스트레스가 밀려온다.

일단 축하편지를 준비해야 한다. 환갑이 지났는데도 ‘예쁘고 상냥하고 귀엽다’는 등여자가 듣기 좋아하는 상투적인 형용사와 함께 ‘사랑한다’는 말이 들어가면 입이 귀에 걸린다. 이것쯤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선물을 고르기도 쉽지 않다. 옷이나 액세서리를 사다 주면 치수나 색상이 마음에 들지 않아 별로 반기지 않는 눈치다. 그래서 몇 년 전부터 현금으로 주거나 필요한 선물을 사 오면 그에 상당하는 돈을 주는 방식으로 바꿨다.

잡채를 요리하는 딸. [사진 조남대]

잡채를 요리하는 딸. [사진 조남대]

제일 난감한 것은 아침상을 차리는 것이다. 미역국 끓이고 잡채 만드는 것은 어깨너머로 보긴 했지만 직접 요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달력의 빨간 동그라미를 보는 순간부터 컴퓨터 회로 돌아가는 것처럼 머리 회전이 빨라진다. 아내는 생일이 다가올수록 이제 며칠이 남았다는 말을 하며 나의 신경을 곤두세운다. 어떻게 하는지 두고 보자는 심상으로 내가 곤란해하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

아내보다 4일 빠른 사위 생일날 딸이 미역국 끓이는 것을 곁에서 유심히 보아 두기는 했지만, 요리라고는 라면 끓이는 것이 전부라 도통 자신이 없다. ‘어떻게 되겠지!’ 하는 기분이 들면서 ‘일 년에 한 번뿐인 아내 생일이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오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지난해까지는 한 아파트 아래 위층에 살아 딸과 사위의 도움을 받아왔는데 올해는 길 건너로 이사하는 바람에 그러기도 곤란해 내 힘으로 차려 봐야겠다고 속으로 다짐해두었다. 언뜻 큰 마트에 갔을 때 조리된 미역국을 본 기억이 났다. 그냥 데우기만 하면 된다. 성의가 부족하다고 탓할지 모르니 미리 사 와서 잘 숨겨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잡채다. 인터넷에 요리 방법을 찾아보니 당면과 채 썬 돼지고기, 표고버섯, 양파, 당근 같은 재료가 필요하고 진간장, 다진 마늘, 설탕, 후추, 맛술의 양념을 준비해야 한다. 그리고 재료를 적당히 썰고 볶아 버무리면 되는 것 같다. 생일 전날에 필요한 재료를 사두었다가 당일 새벽에 일어나 요리를 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계획을 세웠다.

온 가족이 단출하게 차린 아내의 생일상. [사진 조남대]

온 가족이 단출하게 차린 아내의 생일상. [사진 조남대]

그런데 생일 전날 저녁에 딸로부터 전화가 왔다. 생일날이 마침 휴일이라 엄마 생일상을 차려 놓을 테니 두 분이 아침 드시려 건너오라는 것이다. 얼마나 반갑고 고맙던지. 골치 아프던 머리가 갑자기 상쾌해진다. 아빠가 안쓰럽고 못 미더워 도와주기로 한 모양이다. 역시 딸은 나의 은근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한 상 가득 차려진 아내의 생일상 앞에서 “올해는 엄마 생일상을 제대로 차려보려고 했는데 기회를 주지 않는다”며 괜히 큰소리쳐 본다.

아내가 해주는 밥을 평생 먹으면서도 ‘그냥 식사 때가 되었으니 밥을 차려주는 모양이다’ 하며 무덤덤했다. 아내의 생일상 차리는 고민을 하다 보니 끼니마다 반찬을 준비하기 위해 아내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어슴푸레 짐작이 간다. 요즈음은 아내가 외출하려고 하면 “내 식사 걱정은 하지 말고 잘 다녀오라”고 한다. 라면을 끓여 먹기도 하고, 냉장고를 뒤져 떡이나 사과 한 쪽으로 대신하기도 한다. 마음 약한 아내는 식탁 위에 데우기만 하면 먹을 수 있도록 갈비탕이나 반찬을 준비해 놓고 나간다. 이런 아내를 보면 고마운 마음이 들어 앞으로 나의 식사로 인한 스트레스는 주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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