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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시집 『개 같은…』 펴낸 김신용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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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세상에 시인들이 참 많아졌다. 소녀적 문학의 꿈을 지녔던 주부들은 평생교육 제도로, 정의감에 불타는 열혈 청년들은 왜곡된 정치·사회 상황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은 출판자유화에 따른 출판시장의 확대 등 나름의 사회적 여건에 힘입은 나름의 목소리와 감성으로 앞다퉈 시인이 되는 시대가 됐다.
시인이 많아지고 시의 폭도 확대됨에 따라 도대체 시인이란 무엇이며 시란 무엇인가가 헷갈리는 시대가 했다.
『가로수에서/멀어지는 마른 잎새 하나마저, 꼭 지게! 하고 부르는 손짓 같아…지친 걸음 멈추면 벌써 저물 무렵, 서울에서/부산까지 2시간만에 주파한다는 탄환열차/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빌딩들, 명동의/허공에는 뿔이 돋고, 네온사인, 마귀 할멈의/눈빛이 켜지고 있다./일세집 아주머니의 얼굴에서/방세 독촉의 송곳니가 돋아나 지나가는 여자의 핸드백이 몽땅/지게 짐으로 보인다./…/마른 잎새 하나가 널어져 내린다. 꼭 지데! 하고 부르는 손짓 같아…/그 환청한 잎을 찾아 떨어져 내리지 못하고 내/맴돌고 있는, 맴돌고 있는…』(「어떤 공친 날」).
시의 홍수 속에서 기성시·아마추어시·지식인시·농민시·노동자시·순수시·서정시·도시시·민중시·해체시 등으로 끝없이 분화돼가며 시의 동질성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요즘, 분화작용을 뛰어넘어 시란 바로 이런 것이다를 펴 울리게 하는 김신룡씨(45). 2000년대 최첨단도시를 향한 청사진이 펼쳐진 서울 한복판에서 지게꾼으로 살아가다 어떤 공친 날 뒷골목 허름한 술집에서 김씨는 시인이 됐다.
소주병을 앞에 놓고 작업복 윗주머니에서 꺼내보던 꼬깃꼬깃 때에 절은 종이목이 옆자리에 있던 한 시인에게 발각됐다. 그종이 쪽지에는 첫눈에도 기성시인의 시를 능가하는 몇편의 시들이 깨알같이 쓰여 있었다. 이 시들은 곧바로 활자화돼 88년 가을 시전문 무크 『현대시사상』창간호에 실렸고 그해 말 그의 첫 시집 『버려진 사람들』(고려원간)이 나왔다.
「맑은 사람의 정신과 빛나는 감성위에 예술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평과 함께 90년대 시를 이끌 시인으로 떠올랐던 김씨가 최근 두번째 시집 『개 같은 날들의 기록』을 펴내 다시 시의 참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22세 때인가 한1년 빵간에 있을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비록 갇혀 얻어맞기는 하지만 세끼와 잠잘 곳 걱정 안하게 되니 문학적 감성이 슬며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더군요.』 부산 자갈치시장에서 나고 자라다 중학 3년 때인 14세 때 부랑을 시작, 30여년 간 집도 아내도 없이 지게꾼·광원·공사장 잡역부·철거반원 등으로 떠돌고 있는 김씨는 그러나 닥치는 대로 시집과 시이론서를 읽고 쓰고 했다.
『수건을 입에 물고 색서폰을 불면/소매치기 벙어리 여인은 노래를 불렀지/문둥이 미스리는 몽그라진 손으로 젓가락을 두드리고/돗자리 부대 남희엄마 넘치도록 막걸리를 따랐지/꼬리를 본 돈이건, 도둑질을 한 술값이든/인피통장에서 꺼낸 것이건 가리지 않았네/들리기 않는 내 석서폰 음률에 가사 없는 노래로/취하기만 하면 되었지/고향 얘기 따윈 결코 하지 않았네/무리는 고향이 없네, 그 남산길/떨군 혈육 한점 없는 통술집 할머니 끝내 목매단 날/…/또다시 그녀의 분신들이 시식하고 있는 남산길/오늘도 혼자 걷고 있네/사무치게 수건색서폰이 불고싶은 날』(「수건 색서폰」중).
『나는 구석진 곳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니까 억울함도 느껴고 피눈물 나는 통탄도 생깁니다. 그러다 보니 시라는 것이 저절로 잡히더군요.』
가장 구석진 곳에 버려진 사람들과 등짝 맞대며 살아오고 있다는 김씨의 시 세계는 바로 버려진 사람, 버려진 것들과의 몸섞음이다. 버려진 사람들의 삶의 공간, 손바닥만한 창녀의 방, 무허가 판자집 일세방, 공중변소, 감옥 등은 김씨의 삶과 시의 자궁이다.
그러나 그러한 회한과 통탄의 삶의 목소리를 그의 시에서 찾긴 힘들다. 그는 구석진 곳의 삶에서 우러나는 비애를 그 천형의 사회계층구조를 목소리가 아니라 치밀히 계산된 시적 기법,혹 은 형상화로 드러내 감동을 증폭시킨다.
도저히 소리가 날 수 없는 수건 색서폰과 벙어리 노래, 문둥이 강장이지만 이 부조리한 화음은 그의 시에서는 어느 심퍼니오키스트라보다 훌륭한 하머니를 이루며 몸섞어 사는 사람들의 정을 느끼게 한다. 아울러 부조리한 현실을 시 자체로서 환기시기면서 시적 진실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우리사회 맨 아래 계층의 삶이며서도 그의 시에서 80년대 들어 문학의 중심부로 다시 진입한 「이념」의 냄새는 맡기 힘들다. 그의 시는 그가 몸섞고 사는 세상만을 솔직히 형상화할 때 가장 성공하고 있다.
『민중문학이나 노동해방문학 진영에서는 가장 소외된 계층이면서도 이념불감증에 빠져있다며 내 시를 싫어합니다. 나라고 못사는 사람들도 잘 살게 된다는 혁명을 왜 꿈꾸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러한 세계에 이바지하려는 시를 의도적으로 쓰다보면 꼭 실패하고 말아요. 진정한 내 시가 아닌 것 같아요.』
시와 시인이 이분화되지 않은 시를 쓰겠다는 김씨의 시에는 시적 진실이 들어 있다. 그 진실 속에서 김씨는 노동도 빈민도 서정도 시학도 너끈히 껴안고 있다.
모든 것이 분화되고 있는 시대, 김씨는 자기 시가 자신의 사회적 계층이나 주제에 의해「도시빈민시」로 편가름하여 불리길 원하지 않는다. 그의 시속에는 체험의 솔직성과 미학에 대한 치열한 탐구가 들어 있다. 무슨무슨 시하는 구차스런 관형어를 뛰어넘어 「시는 시일뿐」이라는 것을 그의 성공한 시들은 잘 보여 주고 있다. <이경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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