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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고개, 수많은 이야기 13-문경새재] 신립 장군이 버린 조령 … 20대 “서울시청 앞에서 걸어왔어요”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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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8호 24면

스무 고개, 수많은 이야기 〈13〉 문경새재 

과연 큰 고개다. 새벽부터 하루를 온전히 바쳐야만 두루 살필 수 있는 큰길이다. 옛사람들이 ‘영남대로’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그 큰 고개를 큰 사내 하나가 저벅저벅 넘어왔다. 경기도 광주에 사는 강모(29)씨다.

조령 혹은 새재라고 부르던 문경새재는 하늘재를 밀어내고 영남과 호서를 잇는 큰 고개가 됐지만 20세기 들어 추풍령에게 길목이라는 자리를 내줬다. 문경새재는 이제 본연의 '쓸모'보다 볼거리와 이야기를 전하는 관광지가 됐다. 김홍준 기자

조령 혹은 새재라고 부르던 문경새재는 하늘재를 밀어내고 영남과 호서를 잇는 큰 고개가 됐지만 20세기 들어 추풍령에게 길목이라는 자리를 내줬다. 문경새재는 이제 본연의 '쓸모'보다 볼거리와 이야기를 전하는 관광지가 됐다. 김홍준 기자

“20대의 마지막 해, 마지막 달인데 뭐라도 남기고 싶어 국토대장정에 나섰습니다.” 지난 8일 문경새재 오픈세트장 앞에서 만난 강씨는 온전히 두 발로, 서울시청에서 출발했단다. 서울을 벗어나는 데만 이틀이 걸렸고 자신이 사는 경기도 광주를 거쳐 경기도 이천, 충북 음성-충주-수안보-괴산을 거쳐 여기까지 왔다. 그는 “하루 30㎞ 정도 걷고, 당일 행선지와 잘 곳은 그때그때 정한다”고 밝혔다. 그의 1차 목표는 부산. 가만, 그가 영남대로를 걷고 있는 게 아닌가.

영남대로는 조선이 개국(1392년)하면서 문을 열었다. 같은 시기 뚫린 관동대로는 대관령을, 경흥대로는 철령을 그 길의 으뜸 고개로 만들었다. 관동·관서·관북이란 말도 이때 나왔다. 호서에서 백두대간 동쪽 너머의 영남과 이어지는 새로운 고개, 즉 새재(혹은 조령)도 영남대로를 따라 뜨기 시작했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이 고개는 으레 문경새재로 부른다.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에 걸쳐 있지만 왜 문경새재라고 통칭할까. 문경새재도립공원 관계자는 “관문과 원(院)터·정자·사찰 등 새재의 주요시설이 문경 쪽에 몰려있기 때문”이라며 “괴산 쪽 새재는 연풍새재라고 부른다”고 밝혔다. 연풍새재는 제 3관문(조령관)에서 괴산 연풍면 소조령까지 8㎞ 구간이다. 소조령 전망대에서는 색소폰을 멋들어지게 부는 백발의 여성을 만날 수도 있다.

너무 험해 ‘새’도 날아서 넘기 어려우니, ‘억새’가 하도 우거지니, 한양으로 가는 ‘샛길’이라니 새재라 이름 새겨졌다. 하나 더하면, 하늘재를 버리고 ‘새로’ 닦은 고개라고 해서 새재다. 하늘재를 버리다니. 길은 쓸모에 의해 다듬어지고 이름을 남기는 것이다.

# 새로 닦아서, 새도 넘기 힘들어서 '새재'
“저기 포암산(962m)과 탄항산(856m) 사이에 하늘재, 주흘산(1106m) 뒤에 문경새재, 조령산(1026m)이랑 희양산(999m) 사이에 이화령. 보여요?”

경북 문경의 단산에서 바라본 문경 일대. 가운데 우뚝 솟은 문경의 진산 주흘산 뒤로 문경새재가 있다. 김홍준 기자

경북 문경의 단산에서 바라본 문경 일대. 가운데 우뚝 솟은 문경의 진산 주흘산 뒤로 문경새재가 있다. 김홍준 기자

지난 9일, 경북 문경 단산(956m)에 올랐다. 단산관광모노레일 정상부에서 매점을 운영하는 권순양(58)씨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손가락을 가리키며 설명해 줬다. 새재·하늘재·이화령은 조령삼로(鳥嶺三路)로 부른다. 시대의 쓸모에 따라, 이 고개들의 운명이 속속 갈렸다.

조선 시대 새재가 열리면서 삼국시대부터 충주와 문경을 드나들던 길목으로 위세를 떨치던 하늘재(혹은 계림령)는 차츰 사람의 발길이 끊겼다. 영남과 호서를 잇는 이름난 고개는 더 있다. 추풍령(경북 김천~충북 영동)이 있고, 죽령(경북 영주~충북 단양)이 있다. 하지만 부산(동래)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는 중간의 새재는 가장 빠르고 편했다. 선비들의 과거길로도 쓰인 새재를, 추풍령과 죽령이 따라가기에는 벅찼다. 하지만 이도 조선 시대까지만이었다.

경부고속도로는 경인고속도로에 이은 우리나라 두 번째 고속도로이고. 추풍령휴게소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도로 휴게소다. 김홍준 기자

경부고속도로는 경인고속도로에 이은 우리나라 두 번째 고속도로이고. 추풍령휴게소는 우리나라 최초의 고속도로 휴게소다. 김홍준 기자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을 잇는 고개로 새재와 경쟁한 이화령은 예전 '이유릿재'로도 불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이화현(伊火峴)이라 적었는데, 훗날 일본인들이 이화령(梨花嶺)으로 바꿨다고 한다. 오른쪽 산중턱에 난 길이 이화령 옛길에 난 도로이고, 아래는 이화령터널로 이어지는 국도 3호선이다. 김홍준 기자

경북 문경과 충북 괴산을 잇는 고개로 새재와 경쟁한 이화령은 예전 '이유릿재'로도 불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이화현(伊火峴)이라 적었는데, 훗날 일본인들이 이화령(梨花嶺)으로 바꿨다고 한다. 오른쪽 산중턱에 난 길이 이화령 옛길에 난 도로이고, 아래는 이화령터널로 이어지는 국도 3호선이다. 김홍준 기자

포암산을 끼고 경북 문경에서 충북 충주로 이어지는 하늘재 도로는 이곳 월악산 입구에서 끊어지고 도보로 고개를 넘어야 한다. 삼국시대부터 영남-충주를 잇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고개로 기록돼 있다. 김홍준 기자

포암산을 끼고 경북 문경에서 충북 충주로 이어지는 하늘재 도로는 이곳 월악산 입구에서 끊어지고 도보로 고개를 넘어야 한다. 삼국시대부터 영남-충주를 잇는,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고개로 기록돼 있다. 김홍준 기자

20세기 들어 경부선·경부고속도로·국도4호선이 깔린 추풍령이 새재의 찬란한 영광을 빼앗아 갔다. 추억 속의 하늘재야 그렇다 치고, 새재에 이웃한 이화령에 번듯한 도로가 생기고 그 밑에 이화령터널(1998년)까지 생겨 사람들의 발길을 몰아갔다. 하지만, 이도 잠시. 중부내륙고속도로가 개통하고 백두대간 밑으로 문경새재터널(2004년)이 뚫리니, 이화령터널은 2005년 하루 평균 차량 3000대도 지나지는 않는, 교통 수요를 오판한 대표적인 사업으로 낙인 찍히고 말았다.

길의 새옹지마란 이런 것이다. 필요와 경쟁 때문에 길은 부침을 겪는다. 길에서는 간혹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조선의 장수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 "신립, 조령 택했어도 왜군 막기 어려웠을 것"
지난 8일 충북 충주 탄금대 공원. 조미라(52·경기도 의정부시)씨 일행은 "물안개가 껴서 더 멋지네"라며 '열두대'에서 용섬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었다. 열두대는 1592년 임진왜란 때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친 신립(1546~1592)이 활시위를 식히기 위해 열두 번 강에 오르내렸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 신립에게는 불명예스러운 평가가 따른다. ‘오판’이라는 멍에다.

신립은 임진왜란 당시 조령(문경새재) 대신 이곳 탄금대를 왜군에 맞설 곳으로 정했지만 살아 남은 조선군으 거의 없었다. 신립이 뜨거워진 활시위를 식히기 위해 열두 번 강물에 오르락내리락 했다는 열두대에서 바라본 용섬. 김홍준 기자

신립은 임진왜란 당시 조령(문경새재) 대신 이곳 탄금대를 왜군에 맞설 곳으로 정했지만 살아 남은 조선군으 거의 없었다. 신립이 뜨거워진 활시위를 식히기 위해 열두 번 강물에 오르락내리락 했다는 열두대에서 바라본 용섬. 김홍준 기자

임진왜란 전까지 신립은 조선의 명장으로 칭송받았다. 온성부사로 부임한 신립은 중장갑 기병인 철기군(鐵騎軍) 500명을 양성했다. 1583년 두만강에서 여진족 이탕개의 난이 일어나자 그는 철기군으로 적진을 파고들어 적장을 살해했다. 선조는 “한양에 있는 신립의 모친에게 매일 고기를 대령하라”며 그를 총애했다.

임진왜란. 선조는 신립을 경상·충청·전라의 군을 책임지는 삼도순번사로 임명했다. 신립이 충청에 도착했을 때 이미 왜군은 상주를 지나 경북·충청의 경계인 조령에 도착했다. 신립은 이때 의문의 결단을 내렸다. 험준한 조령에서 막자는 부장들의 의견을 뒤로하고 충주 벌판의 탄금대를 택했다. 신립은 조령에 허수아비를 세웠는데, 왜군 정찰병이 허수아비 머리에 새가 앉자 조선군이 없음을 간파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알려진 대로, 탄금대 전투에서 생존한 조선군은 거의 없었다. ‘27일 단월역 앞에 진을 쳤다. "적이 벌써 충주로 들어왔다"고 하는 군졸이 있자, 신립은 군사들이 놀랄까 염려하여 즉시 그 군졸의 목을 베어서 엄한 군령을 보였다. … 적이 후방을 포위하였으므로 아군이 마침내 대패하였다. 신립은 포위를 뚫고 달천 월탄가에 이르러 부하를 불러서는 “전하를 뵈올 면목이 없다”고 하고 빠져 죽었다. 그의 종사관 김여물과 박안민도 함께 빠져 죽었다(조선왕조실록 선조 25년 1592년 4월 17일).’

충북 충주 탄금대(명승)에 있는 '충장공 신립 장군과 팔천고혼위령탑'에 세워진 신립 장군 동상.김홍준 기자

충북 충주 탄금대(명승)에 있는 '충장공 신립 장군과 팔천고혼위령탑'에 세워진 신립 장군 동상.김홍준 기자

왜 신립은 조령을 버리고 탄금대를 택했을까.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은 “신립은 비정규군 격인 여진족과 왜구를 제압한 철기병에 한 과신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상대는 요새화한 동래성마저 반나절 만에 무너뜨린 일본 정규군이었다"며 "왜군에게 겁먹고 이탈하려는 장병들을 통제하기 위해 험준한 조령보다 비교적 평탄한 탄금대에 배수진을 쳤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탄금대 대신 조령을 택했다면? 임 소장은 “결과론적인 비약”이라며 “조령에서 맞서 싸웠어도 정예화한 왜군을 막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그 이유로 “조선의 군대가 왜군에 대한 준비를 아예 안 했던 게 아니라 ‘제대로 된’ 준비를 안 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왜란을 대비하고 있었지만, 오랜 기간 전국시대를 거치며 철기병 시대를 종식한 일본군에 대항하기 위한 효과적 훈련, 즉 적의 수준에 맞추는 전술을 개발하면서도 자신의 장점을 살리는 걸 등한시했다는 말이다.

충북 충주 탄금대에 있는 신립 장군 순절비. 신립은 임진왜란 직전까기 철기군을 거느리며 여진족과 왜구을 제압한 명장으로 칭송 받았다.김홍준 기자

충북 충주 탄금대에 있는 신립 장군 순절비. 신립은 임진왜란 직전까기 철기군을 거느리며 여진족과 왜구을 제압한 명장으로 칭송 받았다.김홍준 기자

'상(선조)이 "신립은 어찌하여 패했는가?"하고 물으니, 민종신(선전관)은 "새재(조령)를 미처 지키지 못하고 있다가 적이 새재를 넘어와 밤중에 돌격해 오니 패배한 것입니다"고 아뢰었다(선조 25년 5월 10일).'

이렇게 조정에서는 신립이 조령 대신 탄금대를 택한 걸 후회했다. 1594년에야 새재 제 2관문 조곡관이 들어선 이후 1708년까지 세 개의 관문이 완성됐다.

문경새재 제2관문인 조곡관. 선조 27년(1594)에 충주인 신충원이 축성하였다. 처음 이름은 조동문이었지만 1978년 개보수하면서 조곡관으로 바꿨다. 김홍준 기자

문경새재 제2관문인 조곡관. 선조 27년(1594)에 충주인 신충원이 축성하였다. 처음 이름은 조동문이었지만 1978년 개보수하면서 조곡관으로 바꿨다. 김홍준 기자

문경새재 제3관문인 조령관. 1708년에 중창한 것을 1976년에 복원했다. 조령관 북쪽은 충북 괴산이고 남쪽은 경북 문경이다. 김홍준 기자

문경새재 제3관문인 조령관. 1708년에 중창한 것을 1976년에 복원했다. 조령관 북쪽은 충북 괴산이고 남쪽은 경북 문경이다. 김홍준 기자

가장 중요한 길이기 때문에 전쟁에 시달린 고개. 한때 과거를 보기 위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분주한 발걸음이 이어지던 고개. 새재는 이제 도립공원이라는 또 다른 쓸모를 갖추고 한해 관광객 200만 명의 발길을 받아준다.

지난 8일. 새재에 어둠이 순식간에 닥쳤다. 문경새재에는 제1관문을 비추는 불빛 외에 조명이 없다. 새재 아래 첫 마을인 상푸실(상초)에 휴게소 몇 곳 빼곤 민가가 사라진 게 20여 년 전이니, 더욱 진하게 느껴진 어둠의 근원은 삶의 공백 때문이다. '산불됴심' 비석의 글자를 더듬더듬 눈으로 만져본다. 한글 창제 후 구한말까지 만들어져 남아있는 4개의 순수 한글 비석 중 하나란다. 간혹 사극 ‘이방원’ 촬영 차량이 새재 한쪽의 오픈세트장에서부터 어둠을 가르기는 했지만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다.

문경새재도립공원의 '산불됴심' 비석. 영·정조 때 세워진 곳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한글 창제 이후 구한말까지 새겨진 한글 비석 중 남아 있는 4개 중 하나다. 김홍준 기자

문경새재도립공원의 '산불됴심' 비석. 영·정조 때 세워진 곳으로 추정되는 것으로, 한글 창제 이후 구한말까지 새겨진 한글 비석 중 남아 있는 4개 중 하나다. 김홍준 기자

문경새재 조령원은 고려·조선 시대에 공용으로 출장가는 관리들의 숙식을 제공해 주는 공공 시설물로 이용되다가 조선 후기부터는 나그네들에게도 편의를 제공했다. 고려 초기 혹은 신라 중엽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김홍준 기자

문경새재 조령원은 고려·조선 시대에 공용으로 출장가는 관리들의 숙식을 제공해 주는 공공 시설물로 이용되다가 조선 후기부터는 나그네들에게도 편의를 제공했다. 고려 초기 혹은 신라 중엽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김홍준 기자

핸드폰 배터리가 방전됐다. 장갑 없는 손이 언다. 나 하나라도 지킬 작은 준비도 안 했음을 후회한다. 날이 저물면 고개를 넘지 못해 지난날 객들이 묵던 조령원·동화원은 터로만 남은 채 어두운 침묵을 유지한다. 처녀귀신을 모신 제1관문(주흘관) 옆 서낭당에 웬 여자 웃음소리가 흘러나온다. 국토대장정 중이라는 강씨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문경새재 교귀정(交龜亭)은 조선시대 신임 경상감사가 전임 경삼감사로부터 업무 인수인계를 받던 곳이다. 1470년에 세워져 1999년에 재건됐다. 김홍준 기자

문경새재 교귀정(交龜亭)은 조선시대 신임 경상감사가 전임 경삼감사로부터 업무 인수인계를 받던 곳이다. 1470년에 세워져 1999년에 재건됐다. 김홍준 기자

지난 12월 8일 문경새재 제1관문인 주흘관에서 문경새재도립공원 입구로 향하는 길에 어둠이 내렸다. 주흘관을 비추는 조명 외에 야간 에 큰 도움을 줄 빛이 거의 없다. 문경새재의 한 카페 사장은 ″이곳은 일교차가 심하고 해가 급격히 떨어지니 주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홍준 기자

지난 12월 8일 문경새재 제1관문인 주흘관에서 문경새재도립공원 입구로 향하는 길에 어둠이 내렸다. 주흘관을 비추는 조명 외에 야간 에 큰 도움을 줄 빛이 거의 없다. 문경새재의 한 카페 사장은 ″이곳은 일교차가 심하고 해가 급격히 떨어지니 주의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김홍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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