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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말 대잔치' 판치는 요즘…20년 전 '버럭통화' 떠올랐다 [Law談-오인서]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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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암리에 존재하던 사회적 관행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하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 사람들의 의식이 자연스럽게 바뀌기도 하고 국가가 정책적으로 변화를 이끌어 갈 때도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법을 위반한 운전자가 벌칙금을 면하기 위해 소액을 건네는 사례가 있었다. 서울 대림역 인근에서 경찰이 음주운전 단속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과거에는 법을 위반한 운전자가 벌칙금을 면하기 위해 소액을 건네는 사례가 있었다. 서울 대림역 인근에서 경찰이 음주운전 단속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과거에는 자동차로 도로를 주행하다가 사소한 법규 위반으로 단속되면 교통 경찰관에게 소액을 건네주고 벌점이나 범칙금을 면해 보려는 운전자들이 존재했다. 이를 당시 한국 사회에 만연했던 일반적 관행으로까지 단정하기는 어렵겠지만 그런 사례들이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20여 년 전 고속도로에 인접한 어느 지역의 검찰 지청에 근무할 때였다. 경찰에서는 그 무렵 이런 행동을 하는 운전자들을 ‘뇌물공여 의사표시(형법 제133조 제1항, 제129조 제1항)’로 입건해 검찰에 송치했다. 사건을 배당받은 날 기록들을 검토하다 보면 뇌물공여 의사표시 사건이 몇 건씩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전 다른 청 근무 시절에는 거의 볼 수 없었던 사건이고 죄명이었다. 운전자들에게 경각심을 주어 교통 문화를 한 단계 높이려는 정책적 결단이 반영된 게 아니었던가 싶다.

어느 날 뇌물공여 의사표시 송치 사건들을 처리하면서 약식 기소할 벌금액을 정하고 피의자들에게 예납 통지를 했다. (벌금 예납은 검찰의 징수 편의에 주안을 둔 제도로 비판받아 현재는 운용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며칠 후 실무관을 통해 화물차 운전기사인 피의자 한 명으로부터 항의성 전화를 받았다. 요지는 “사회 물정도 모르는 새파란 검사가 회전의자에 앉아 펜대를 굴리며 서민을 죽인다”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문제도 되지 않던 일로 입건돼 기분이 좋지 않던 피의자가 단속 경찰관에게 제공하려던 돈의 수십 배 되는 벌금 예납을 통보받자 흥분해 담당 검사에게 자기 속내를 직설적으로 쏟아낸 것이다.

그 무렵 해당 지청은 도시화와 공업화가 광범위하게 진행되며 청의 인원에 비해 사건 수가 많은 편이었고 대부분의 검사가 사건 처리를 위해 일과시간 집중근무는 기본이고 야근도 일상화하고 있었다. 당시 필자는 검사실 사정을 모르는 피의자의 막말에 부아가 나 새파란 검사의 감정으로 대응했다. 억울한 부분이 있으면 검찰청에 출석해 제게 직접 말씀하시라며.

며칠 후 화물차 기사가 검사실로 찾아 왔고 나는 그를 내 책상 옆에 자리를 마련해 준 후 업무를 계속하며 대화를 나눴다. 그에게 부산한 검사실의 일상을 보여주며 “회전의자에 앉아 펜대나 굴리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싶었던 유치한 속셈이었다. 한 시간여에 걸쳐서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 등을 나누다가 그가 돌아갔다. 그 사건을 법원에 기소할 때 예납 통보액보다 벌금 구형액을 하향했는지 여부는 너무 오래되어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사건 자체를 아직 기억하는 이유는 피의자와 검사 간에 각자의 형편과 처해 있는 환경을 잘 몰랐고 사건을 보는 시각과 기준 차가 너무 컸던 탓이다.

법률적 시비를 가리는 판검사에겐 역지사지의 자세가 더욱 요구된다.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의 모습. 뉴스1

법률적 시비를 가리는 판검사에겐 역지사지의 자세가 더욱 요구된다.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의 모습. 뉴스1

주지하다시피 ‘처지를 바꾸어 생각하는 것’을 역지사지(易地思之)라고 한다.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 속에 살아가는 세상사 굴레야 과거나 현재에 큰 차이가 없다지만 근간 사회적 이슈에 관해 매스 미디어(mass media)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펼쳐지는 ‘자기 말 대잔치’를 접하다 보면 역지사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세태의 경향은 차지하더라도 법률적 시비를 분별하고 죄의 경중을 판단해야 하는 판·검사들의 심중에는 역지사지의 자세가 더욱 필요할 듯하다.

‘Put yourself in his shoes(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 소통의 지름길이자 상대방을 이해하고 승복시키는 지혜이다.

로담(Law談) 칼럼 : 오인서의 輾轉反側(전전반측)

법률가들이 일상에서 겪는 경험과 각종 법조 이슈에 대한 소회를 담담한 필체로 소개하여 독자들의 법조 전반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제고하고자 합니다.

오인서 변호사.

오인서 변호사.

※오인서 법무법인 화인 형사부문 대표변호사. 수원고검장/대구고검장/서울북부검사장/대검찰청 공안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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