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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시험 못 본 관리 꼬집고 종아리 때리며 망신준 정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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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58)

창덕궁 후원으로 들어서는 길을 지나 처음 만나는 공간이 바로 부용정(芙蓉亭)이 발 담그고 있는 연못이다. 남쪽의 물가에 걸친 듯 세워진 정자 부용정은 활짝 핀 연꽃을 의미한다. 정자 이름처럼 연꽃 한 송이가 연못 한 켠에 피어있는 느낌인데 연못가 남쪽에 살짝 수줍게 걸쳐 있는 부용정은 못을 거울삼아 제 모습을 비추고 있다. 정자의 초석 중 두 발만 물에 담근 것은 더운 여름 선인들이 자연에서 피서하는 탁족을 의인화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자의 한 면은 땅에 걸치고 한 면의 초석을 물에 넣는 것은 사람들이 아예 연지에 섬을 두고 그 위에 정자를 짓지 않는 이상 정자에 앉아 가장 가까이 접근해 물가 풍경을 즐기기 위한 방식이기도 했다. 동궐도에는 부용지에 배가 두 척 떠있는데 정조는 이곳에서 신하들과 낚시를 즐겼다.

창덕궁 규장각 권역. [중앙포토]

창덕궁 규장각 권역. [중앙포토]

규장각을 오르는 어수문(魚水門),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신하들도 왕의 뜻 안에서 활약하라는 정조의 강력한 왕권을 표방하는 이름이다. 어수문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은데 그 장식이 만만치 않다. 계단 소맷돌 면석의 구름 문양이 매우 아름답고 문은 투각한 용틀임으로 한껏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 구름은 장수를 상징하는 십장생 중의 하나로 불로장생을 뜻하고 하늘, 즉 선계에 오른다는 의미로 해석한다. 이들 문양은 모두 부용지 일대를 선경으로 표현하기 위한 장치다.

푸른 담장 취병

취병. [사진 이향우]

취병. [사진 이향우]

어수문을 가운데 두고 양쪽으로 대나무로 틀을 짜서 만든 생울타리 담장은 취병(翠屛)이라 부른다. 동궐도에 보면 후원 여러 군데에 이러한 취병을 설치한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취병이란 말 그대로 푸른 병풍 담장이다. 생나무로 엮은 취병은 돌이나 벽돌을 쌓아 만든 담장보다 위압적이지 않으면서도 공간을 구획해주는 여유로운 차단 효과를 주는 전통 방식의 울타리 담장이다. 집의 경계를 삼는 담장이 필요한 곳에 딱딱한 재료인 돌이나 벽돌을 쓰는 대신 나무 울타리를 꾸며 시각적인 차단 효과를 주면서 자연에 더 친화적인 느낌을 주는 공간 구획 방식이다.

정조는 창덕궁 후원에 종종 신하들을 초대해 이 영화당과 부용지 일대에서 신하들과 함께 시를 짓고, 책을 읽고, 낚시를 하며 풍류를 즐겼다. 신하들뿐만 아니라, 그 아들과 조카, 형제들을 초대해 이곳에서 봄놀이를 즐겼다는 기록이 실록과 홍재전서 뿐 아니라 당시 초대 받은 정약용의 여유당 전서에도 드러난다. 초기에는 정조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각신, 승지, 사관 5명 남짓의 소수 초계문신을 데리고 유람했는데, 정조 16년에 공식적으로 내각 상조회를 발족하고 창덕궁 후원 유람을 정례화하면서 마지막에는 대신, 중신, 승지, 사관, 각신과 형제, 자식, 조카, 재종, 삼종까지 98명이 함께 유람하는 대규모 행사로 자리 잡았다. 재미있는 예화로 정조가 신하들에게 운을 띄우고 시를 지어보라고 시켰는데, 당황하고 긴장하여 시를 짓지 못한 신하는 연지 가운데 섬으로 유배 보낸 이야기가 있다. 정조의 장난기와 꽃놀이 하다가 귀양 갔을 선비의 난감해하는 표정이 떠오르는데, 정조는 자신의 학문과 무예를 신하에게 강요하는 고집 센 군주이기도 했다.

표암(豹菴) 강세황은 ‘호가유금원기(扈駕遊禁苑記)’에서 자신이 임금을 모시고 후원을 구경한 이야기를 썼는데, 임금과 신하가 후원을 출입한 사실에 대해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강세황이 누린 이 전례가 없는 후원 유람은 규장각의 완비, 왕의 위엄을 나타내는 어진도사 등에 기여한 근신의 노고를 치하하는 자리에서 이루어진 격식이 없고 다소 즉흥적인 유람이었다. 왕이 친히 신하들에게 궁원을 안내하고 설명한 일을 기록한 ‘호가유금원기’는 한국의 조경문화사에 있어 매우 귀한 사료이다.

동궐도에 그려진 취병. 동아대 소장본.

동궐도에 그려진 취병. 동아대 소장본.

어찌 우리 임금께서 몸소 이 미천한 신하들을 거느리고 좋은 경치와 명승지를 낱낱이 알려주면서 온화한 얼굴과 부드러운 음성으로 한집안 식구나 다름없이 …중략… 이는 과거의 기록을 두루 찾아보아도 전혀 없던 일이다.

- 〈표암고〉 호가유금원기, 정조 5년 9월 3일

내원에서 꽃구경을 하고 낚시질을 하다 (賞花釣魚于內苑) (정조 19년(1795 을묘) 3월 10일 1번째기사)
내원(內苑)에서 꽃구경을 하고 낚시질을 하였다.…중략…
올해야말로 천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경사스러운 해이다. 그러니 이런 기쁜 경사를 빛내고 기념하는 일을 나의 심정 상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매년 꽃구경하고 낚시질하는 놀이에 초청된 각신의 자질(子姪)이 아들이나 아우나 조카에만 한정되다가 올해에 들어와 재종(再從)과 삼종(三從)으로까지 그 대상이 확대된 것 역시 대체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즐거움을 나누려는 뜻에서다”하였다. … 

또 부용정의 작은 누각으로 거둥하여 태액지(太液池)에 가서 낚싯대를 드리웠다. 여러 신하들도 못가에 빙 둘러서서 낚싯대를 던졌는데, 붉은색 옷을 입은 사람들은 남쪽에서 하고 초록색 옷을 입은 사람들은 동쪽에서 하고 유생들은 북쪽에서 하였다. 상이 낚시로 물고기 네 마리를 낚았으며 신하들과 유생들은 낚은 사람도 있고 낚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한 마리를 낚아 올릴 때마다 음악을 한 곡씩 연주하였는데, 다 끝나고 나서는 다시 못 속에 놓아 주었다. 밤이 되어서야 자리를 파했다.

정조의 꿈, 규장각(奎章閣)과 주합루(宙合樓)

연지를 지나 북쪽 언덕에 주합루(宙合樓)라는 편액이 걸린 2층 전각이 보인다. 1층은 규장각, 2층은 주합루로 부르던 왕실 도서관이자, 학술과 정책을 연구하는 기관으로 정조 즉위년에 지었다. 정조는 이 집을 지으면서 어떤 이상을 꿈꾸었을까? 주합루란 천지 우주와 통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주합(宙合)은 육합(六合), 즉 상하(上下)와 사방(四方)을 가리키는데 이는 곧 천지(天地)를 의미한다. 그래서 주합은 위로는 하늘로 통하고 아래로는 땅의 지극함에 도달하며, 밖으로는 천하로 나가 천지와 합하여 포용을 이룬다는 의미이다. 규장(奎章)은 황제가 지은 문한이나 어필을 말하는데 규장각이란 문장을 담당하는 하늘의 별인 규수가 빛나는 집이라는 뜻이다. 정조는 세종대의 집현전 같이 홍문관을 확대한 규장각에 강력한 친위세력을 양성하고 개혁정치의 선도적 중심기구로 활용했다. 바로 정조의 개혁정치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지은 집이 규장각이다.

정조는 애초에 왕의 글이나 왕실족보, 물품 등을 보관하던 작은 서고에 지나지 않던 규장각을 국내외의 귀중한 도서를 소장하는 왕립 도서관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규장각을 왕의 측근 실무기구로서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학문을 연마하는 연구소로, 그 인물들이 성장함에 따라 왕의 자문기구, 비서실, 정책개발실, 출판소등으로 그 기능을 확장시키고 정권의 핵심 기능을 맡게 했다. 규장각은 정조대의 문예부흥의 산실이었던 것이다.

초계문신 제도(抄啓文臣制)

정조가 25세의 나이로 할아버지 영조의 뒤를 이어 국왕이 되었을 때 그의 권력적 기반은 매우 취약했다. 국왕의 개혁정치를 측근에서 뒷받침할 할 만한 정치세력이 아직 형성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를 타개하기 위하여 정조는 친위세력의 양성을 계획했는데, 문반의 관리는 규장각의 초계문신제도, 무반의 관리는 선전관 제도와 장용영의 육성을 통해 해결 했다.

비선생물입(比先生勿入), 견래객불기(見來客不起)

선생이 아니면 들어오지 말고 손님이 오는 것을 보더라도 일어서지 말라는 뜻이다. 정조는 규장각에 이 두 글귀를 걸어두고 글공부하는 인재가 공부에 방해받지 않고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정조는 왕이 직접 관여했던 문관들의 심화 학습 과정으로 ‘초계문신제(抄啓文臣制)’를 시행했다. 이 제도는 37세 이하의 문과에 합격한 초급 관리들 중에서 학문적 재능이 있는 사람을 선별해 교육시켜서 40세가 되면 졸업시키는 일종의 공무원 재교육 프로그램이었다. 초계문신에 선발 된 관리는 다양한 혜택을 받았지만 그들의 교육과정은 매우 엄격했기 때문에 초계문신으로 선발되었던 정약용은 초계문신이야 말로 없어져야할 고약한 제도라고 할 정도였다. 규장각에서는 이들에게 매월 두 차례의 시험을 실시해 연말에 그 성적을 합산해 상과 벌을 내리는 제도를 시행했다. 시험은 규장각 관리가 주관하는 두 과목의 시험(경전 읽기, 문장 짓기)과 정조가 주관하는 한 가지 시험(문장 짓기)을 보았다.

이때 정조가 주관하는 시험은 문제의 출제에서 채점까지 직접 관리했는데, 기대에 못 미치는 문신을 닦달하면서 꼬집고 종아리를 치기까지 한 모양이다. 그런데 당시 이들 관리가 대개는 장가를 들어 자식까지 있는 나이였으니, 당하는 입장에서는 여간 망신스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국왕의 학문이 깊고 고집 세니 함부로 반발할 수도 없어 참 난감했을 초계문신들의 입장이 짐작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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