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⑩"피해 절반 보상하는 英은행"···"우린 못해" 韓은행들의 핑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해 10월 영국에서 유학 중이던 A씨(23)는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에선 “여긴 HSBC 은행이다. 당신 계좌가 범죄에 이용되고 있으니 4500파운드(약 700만원)를 이 계좌로 송금하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돈을 보낸 A씨는 다음날 보이스피싱에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A씨는 즉시 현지 경찰과 피해 계좌가 있는 HSBC 은행에 신고했다. 며칠 뒤 A씨에게 전화를 걸어온 건 경찰이 아닌 은행이었다. 은행 관계자는 A씨에게 “빨리 신고해줘서 고맙다. 고객 개인정보 보호에 문제가 있었다”며 피해금 절반을 보내줬다. 일부나마 피해를 복구한 A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경찰로부터는 끝내 사건 관련 연락을 한 번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A씨가 만약 한국에서 이런 일을 겪는다면 피해금을 돌려받을 수 있을까.

보이스피싱 피해금, 돌려받으려면.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보이스피싱 피해금, 돌려받으려면.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피해 구제 법 있지만, 돈 빼돌리면 ‘무용지물’

결론부터 말하면 쉽지 않다. 지난해 11월 시행된 통신사기피해환급법은 보이스피싱 피해자가 은행에 구제를 신청하면 별도의 소송 없이 피해금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단, 피해금이 입금된 계좌에 돈이 남아있는 경우에 한해서다. 사기범이 이미 돈을 다른 곳으로 빼돌린 뒤라면 구제가 불가능한 셈이다.

결국 피해자는 사기범에게 민사소송을 걸거나 법원에 배상명령을 신청하는 수밖에 없다. 이마저도 사기범이 잡혀서 재판이 열린다는 전제에서다. 대부분의 보이스피싱 총책이 해외에 거주하고 있어 검거가 어려운 현실을 고려하면 피해 구제는 요원하다.

보이스피싱 피해자들에게 가장 급한 건 피해금 회수다. 중앙일보가 10월 28일~11월 28일 보이스피싱예방협회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68.2%(43명)는 ‘피해금 회수’를 가장 필요한 조치로 꼽았다. 그러나, 피해금을 전혀 돌려받지 못했다는 응답이 절반 이상(35명, 55.6%)이었다.

지난 4월 금융감독원이 발표한 2020년 보이스피싱 현황도 이와 비슷한 추이를 보였다. 금감원이 파악한 지난해 보이스피싱 피해금 2353억원 중 피해자에게 돌아간 금액은 1141억원(48.5%)이었다. 20%대에 그쳤던 예년보다 환급률이 크게 높아졌지만, 여전히 절반 넘는 피해금이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보이스피싱 피해금 얼마나 돌려받았을까.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보이스피싱 피해금 얼마나 돌려받았을까.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해외에선 은행이 구제 주도…한국은 업계 반발에 난항

A씨가 보이스피싱을 당했던 영국에서도 보이스피싱은 큰 사회적 문제다. 영국의 금융기관 협회인 UK Finance 자료를 보면 지난해 영국에서 보이스피싱으로 발생한 소비자 피해 금액은 4억 7900만 파운드(약 7523억원)다. 그중 43.2%인 2억 700만 파운드(약 3251억원)가 피해자에게 돌아갔다. 같은 해 환급률은 한국보다 조금 낮았다. 다만, 기관이나 지인을 사칭해 돈을 요구하는 수법만을 보이스피싱으로 보는 한국과 달리 영국은 물품 거래 사기 등 보이스피싱의 범위를 더 넓게 정의한다.

은행 등 민간을 주축으로 피해 구제 체계를 마련했다는 점도 한국과 다르다. 영국은 금융사 간 자율 규약 형태로 2019년 5월 ‘사기 피해 환불제’(The Contingent Reimbursement Model Code)를 도입했다. 보이스피싱 피해를 본 고객에게 중과실이 없고, 개인정보 유출에 대한 금융사의 책임이 입증되면 은행이 피해금 중 일정 금액을 보상하는 것이 골자다. 업계 1위 HSBC를 포함해 바클레이즈, 로이드뱅킹그룹 등 9개사가 동참했다. 이에 더해 업계에서는 고객이 낸 송금 수수료로 사기 피해 환급 기금을 조성하자는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이에 발맞춰 금융당국은 보이스피싱이 발생했을 때 은행의 피해 구제 의무를 명시하는 법 개정안을 준비 중이다.

홍콩 중심지에 있는 HSBC와 스탠다드차타드 아시아 본사 건물과 로고. 로이터=연합뉴스

홍콩 중심지에 있는 HSBC와 스탠다드차타드 아시아 본사 건물과 로고. 로이터=연합뉴스

영국과 유사한 방안이 한국에서도 논의됐지만, 관련 업계의 이견으로 난항을 겪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6월 ‘보이스피싱 척결 종합방안’을 발표하면서 금융사가 피해금의 일정 금액을 배상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고객 개인정보 유출에 책임이 있는 통신사도 함께 부담을 져야 한다”는 금융업계의 반발에 부딪혀 1년 넘게 결론을 못 내고 있는 상태다.

전문가들은 보이스피싱 피해 구제를 위한 공공과 민간의 ‘투 트랙’ 전략이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서준배 경찰대 행정학과 교수는 “한국은 수사기관이 보이스피싱범 검거 등 사후적인 대응을 영국보다 잘한다. 하지만, 피해 구제와 예방에 초점을 두고 있는 영국식 모델의 장점도 수용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서 교수는 “금융사와 통신사가 함께 보이스피싱 피해 환급 기금을 조성하는 노력도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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