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안난다" 현장 이탈 경찰…매뉴얼엔 테이저건 쏠수 있었다

중앙일보

입력 2021.11.22 05:00

업데이트 2021.11.23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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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인천에서 발생한 ‘층간소음 흉기 난동’ 사건을 둘러싼 경찰의 부실 대응이 비판을 받고 있다. 가해자의 칼부림에 피습을 당한 피해자를 놔둔 채 경찰관이 현장을 이탈한 것을 두고 일각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창룡 경찰청장이 공식 사과하고 관할 서장이 직위해제된 가운데 중앙일보는 2회에 걸쳐 이번 사태의 문제점과 대책을 점검한다.

①경찰의 대응 매뉴얼은 작동하지 않았다

층간소음으로 갈등을 빚은 이웃 일가족 3명을 흉기로 다치게 한 혐의를 받는 40대 A씨가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17일 오후 인천시 미추홀구 인천지방법원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층간소음으로 갈등을 빚은 이웃 일가족 3명을 흉기로 다치게 한 혐의를 받는 40대 A씨가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17일 오후 인천시 미추홀구 인천지방법원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층간소음으로 시작된 갈등이 흉기 난동으로까지 번진 아수라장 속에서 경찰은 보이지 않았다. 가해자의 칼부림으로 피해자가 목 부위에 중상을 입고 위협이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출동한 경찰은 현장을 이탈하고 말았다. 그간 ‘과잉진압’과 ‘소극적 대처’ 사이에서 수차례 논란을 겪어온 경찰이 2년 전 자성의 목소리를 담아 만든 ‘현장 대응 매뉴얼’은 무용지물이었다.

경찰의 현장 이탈…“트라우마라 기억 안 나”

인천 흉기난동 사건과 관련해 경찰관 파면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 [청와대 홈페이지 캡처]

인천 흉기난동 사건과 관련해 경찰관 파면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 [청와대 홈페이지 캡처]

인천시 남동구에서 지난 15일 발생한 ‘층간소음 흉기 난동’ 사건과 관련한 경찰의 부실 대응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날 주민 소란 신고를 받고 출동한 인천 논현경찰서 모 지구대 소속 A경위와 B순경이 신고자와 그의 가족들이 가해자의 흉기 난동으로 피습을 당하는 상황에서 현장을 이탈하거나 신속하게 제압을 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나면서다.

현장을 벗어난 B순경은 지난 17일 피해자 가족과 만난 자리에서 “다친 걸 보고 구조 요청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생전 처음 보는 일이자 처음 겪는 상황이라 그 장면만 계속 떠오르면서 트라우마가 생겼고, 그 장면만 남아서 그 뒤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취지로 얘기했다고 한다.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경찰의 소극적 대처가 논란이 된 적은 많지만 범인 앞에서 사경을 헤매는 피해자를 두고 현장을 이탈한 사례는 들어본 적이 없다”며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 일어났다”고 지적했다.

경찰이 보는 앞에서 목 부위에 중상을 입은 40대 여성은 여전히 의식을 찾지 못했고, 부실한 사건 대응에 인천경찰청장은 공식 사과했다. 그럼에도 경찰에 대한 비판 여론이 잦아들지 않자 21일 인천 논현경찰서장이 직위해제됐고, 김창룡 경찰청장이 직접 나섰다. 김 청장은 이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은 경찰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자 소명인데도 불구하고, 위험에 처한 국민을 지켜드리지 못한 이번 사건에 대해 피해자와 가족, 그리고 국민 여러분께 깊은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부실 대응 논란에 대책 내놓았던 경찰 

2019년 도입된 경찰의 물리력 사용 기준. 현장에서 대상자의 저항 정도에 따라 경찰관이 사용할 수 있는 물리력을 정리해놓았다. 경찰청 제공

2019년 도입된 경찰의 물리력 사용 기준. 현장에서 대상자의 저항 정도에 따라 경찰관이 사용할 수 있는 물리력을 정리해놓았다. 경찰청 제공

당시 일가족 3명이 흉기에 피습을 당할 때 현장에 출동했던 경찰관들은 현장 대응 매뉴얼조차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경찰관들이 따라야 했을 매뉴얼은 지난 2019년 5월 경찰청이 제정한 ‘경찰관 물리력 행사의 기준과 방법에 관한 규칙’이다. 그해 ‘광주 집단 폭행 사건’ ‘암사동 흉기 난동 사건’ ‘대림동 여경 사건’ 등 경찰의 소극적 대처가 부각된 사건들이 잇따르자 경찰청은 사건 현장에서 범인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해 현장 대응 매뉴얼을 제정했다.

이러한 매뉴얼에는 경찰이 물리력을 행사하는 기준과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가이드라인이 담겼다. 대상자(범인)의 행위를 위해 수준에 따라 ▶순응 ▶소극적 저항 ▶적극적 저항 ▶폭력적 공격 ▶치명적 공격 등 5단계로 나누고, 각각에 대응하는 물리력 수준을 세부적으로 규정했다. 대상자가 경찰관이나 시민에게 신체적 위해를 가하는 ‘폭력적 공격’ 상태에서는 경찰봉이나 테이저건 등을 이용한 ‘중위험 물리력’을 행사하게 하고, 사망 또는 심각한 부상을 초래하는 ‘치명적 공격’을 할 경우 최대 권총까지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정작 매뉴얼 지켜야 할 경찰이 현장 벗어나

그러나 인천에서 발생한 이번 사태에서 매뉴얼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출동 당시 A경위는 3단봉과 권총을 소지했고 B순경은 3단봉과 테이저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범행 현장에서 가해자가 B순경을 밀친 뒤 피해자에게 흉기를 휘둘렀음에도 B순경은 지원 요청을 한다는 이유로 현장을 이탈했다. 경찰 관계자는 “당시 상황이 테이저건 등을 사용할 수 있는 요건은 충족한 것으로 보인다”면서 “현장 출동 경찰관이 이를 인식했는지는 조사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2년 전 관련 매뉴얼을 제정할 당시 경찰청은 “향후 이 기준에 따라 교육훈련을 실시해 모든 경찰관들이 제대로 숙지하고 체화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지만 이번 사태에선 말뿐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범인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한 매뉴얼이 있었음에도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며 “이번 사건에선 훈련과 경험 부족으로 인한 판단 미숙이 가장 큰 원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여러 상황 대처 위한 시뮬레이션 훈련 필요” 

이를 위해 전문가들은 다양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시뮬레이션 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층간소음으로 인한 주민 소란이 흉기 난동으로까지 번질 것을 예상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라며 “IT 기술 등을 활용해 여러 상황을 간접경험할 수 있는 교육훈련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어 “일선 경찰들의 직무교육훈련은 사격술 등 기술적인 측면에만 매몰돼 있는 것이 현실”이라며 “층간소음 등 변화하는 시대상에 발맞춘 갈등 해결을 위한 온더잡트레이닝(on-the-job training·직장 내 훈련)이 마련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서울의 한 지구대에 근무 중인 35년 차 경력의 경감은 “경찰이라면 누구라도 경험할 수 있고 나 역시 현장에 있었다면 당황했을 사건”이라며 “시민을 지켜야 할 경찰이 등을 돌린 건 명백한 잘못이었고, 앞으로 그런 일이 없도록 제대로 된 훈련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경찰 선발 과정의 문제를 다시 점검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현행 선발 과정이 사명감을 가진 경찰을 제대로 뽑지 못한다는 문제의식에서다. 이윤호 교수는 “성적순으로 경찰관을 뽑는 선발제도도 개선해야 할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소명 의식을 가지고 경찰관이 된 사람도 있겠지만, 안정적인 공무원의 신분을 목적으로 경찰관이 된 사람도 분명 있다”며 “이들은 경찰관이 되고자 하는 동기 자체에서 사명감이 결여될 수밖에 없지만 현행 선발 제도는 이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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