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기가 합격 좌우…"내 목숨 왜 거나" 몸사리는 경찰 만들었다

중앙일보

입력 2021.11.23 05:00

업데이트 2021.11.24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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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인천에서 발생한 ‘층간소음 흉기 난동’ 사건을 둘러싼 경찰의 부실 대응이 비판을 받고 있다. 가해자의 칼부림에 피습을 당한 피해자를 놔둔 채 경찰관이 현장을 이탈한 것을 두고 일각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창룡 경찰청장이 공식 사과하고 관할 서장이 직위해제된 가운데 중앙일보는 2회에 걸쳐 이번 사태의 문제점과 대책을 점검한다.
②여경 무용론? 훈련 부족이 본질이다
층간소음으로 갈등을 빚은 이웃 일가족 3명을 흉기로 다치게 한 혐의를 받는 40대 A씨가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17일 오후 인천시 미추홀구 인천지방법원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층간소음으로 갈등을 빚은 이웃 일가족 3명을 흉기로 다치게 한 혐의를 받는 40대 A씨가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17일 오후 인천시 미추홀구 인천지방법원에 들어서고 있다. 연합뉴스

인천시 남동구에서 지난 15일 발생한 ‘층간소음 흉기 난동’ 사건은 경찰관의 사명감에 대한 질문을 우리 사회에 던지고 있다. 다수의 전문가와 현장 경찰관은 ‘직업정신 부재’와 ‘훈련 부족’ 등을 문제점으로 지적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최근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에 경찰관으로 추정되는 이용자의 반론이 올라오면서 논란이 확산되고 있다. 그는 “경찰이니까 내 목숨 바친다? 솔직히 적당히 살려고 공무원 택한 거 아니냐”고 주장했다.

‘경찰관’보다 ‘공무원’ 뽑는 채용

지난 15일 인천시 남동구 '층간소음 흉기 난동'에서 미흡한 경찰 대처를 두고 전문가들은 성적순으로 줄세워 뽑는 경찰관 선발 제도를 원인으로 지적했다. 중앙일보 그래픽

지난 15일 인천시 남동구 '층간소음 흉기 난동'에서 미흡한 경찰 대처를 두고 전문가들은 성적순으로 줄세워 뽑는 경찰관 선발 제도를 원인으로 지적했다. 중앙일보 그래픽

이번 사건의 원인을 두고 일부 전문가들은 현재의 경찰관 선발제도가 ‘안정적인 직업 공무원’을 뽑는 제도로 변질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순경 채용시험은 크게 ‘필기시험-체력검사-면접시험’으로 구성된다. 경찰공무원 임용령에 따르면 최종합격자는 필기시험 성적 50%, 체력검사와 면접 성적 각각 25%를 합산해 결정된다. 면접과 체력검사에선 큰 변별력이 없어 사실상 필기시험이 합격의 기준이라는 게 입시업계의 분석이다.

이훈 조선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근본적인 경찰관 업무를 제대로 인식했다면 흉기 앞에서 두려워도 맞서야 한다”면서 “경찰관을 뽑는 채용 제도부터 바꿔야 한다. 성적 높은 순서대로 뽑는데, 시험 성적 좋다고 경찰관을 잘하는 게 아니다”고 지적했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영어 한 문제로 합격과 불합격이 갈리는 경찰관 되는 선발 제도도 문제다. 소명의식을 가지고 경찰관이 되는 사람도 있겠지만, 안정적인 공무원으로서 경찰관이 되는 경우도 많다”고 했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필기시험 성적이 합격의 당락에 큰 영향을 주는 건 맞는다”면서도 “더 적합한 인재 채용을 위해 내년부턴 한국사와 영어는 검정제로 바뀌고 경찰학 등 실무에 필요한 필기시험이 더 강화된다”고 말했다. 이어 “현장에 보다 필요한 체력을 검증하기 위해 2023년부터 일부 채용 분야에 대해 체력시험을 바꾸고 남녀 동일기준·P/F제(합격 및 불합격만으로 구분하는 제도)가 도입된다”고 덧붙였다.

소명의식 교육 소홀한 시스템

중앙경찰학교

중앙경찰학교

경찰관 선발 이후의 교육 과정에 대한 지적도 나온다. 이윤호 교수는 “경찰관 임용까지 뽑는 과정만 있지 퇴출하는 과정이 없다. 중앙경찰학교의 교육이 좋아도 이를 배우는 동기가 부족하다. 영구 임용하기 전에 거르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중앙경찰학교 관계자에 따르면 퇴교는 성적 미달이나 생활 불량 등에 자체 교칙에 의해 이뤄진다. 최근 중앙경찰학교를 수료한 한 경찰관은 “과목별로 과락이나 생활 불량 등으로 인한 벌점 누적 등 퇴교 기준이 있지만, 이 기준으로 퇴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다. 그는 “교육과정에서 경찰관 소명의식을 배우는 정신교육이나 특강은 많지만, 수업을 제대로 듣는 학생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물리력 사용에 부담…‘소극적 경찰’ 만들어

2019년 도입된 경찰의 물리력 사용 기준. 현장에서 대상자의 저항 정도에 따라 경찰관이 사용할 수 있는 물리력을 정리해놓았다. [경찰청 제공]

2019년 도입된 경찰의 물리력 사용 기준. 현장에서 대상자의 저항 정도에 따라 경찰관이 사용할 수 있는 물리력을 정리해놓았다. [경찰청 제공]

경찰 조직의 분위기가 ‘소극적 경찰관’을 만들었다는 지적도 있다. 서울 지구대 팀장으로 있는 한 경찰관(경감)은 “경찰이 현장에서 물리력을 행사하는 데에 위축돼 있다. 현장 판단으로 공권력을 사용해도 책임은 개인이 지고 길게는 몇 년씩 시달린다. 현장 상황은 시시각각 변하고 이에 대처하려면 평소에 자신감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소극적으로 대처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웅혁 건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공권력 사용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분위기가 있다. 매뉴얼이 있어도 핵심은 현장 판단이다. 이에 따라 물리력을 사용하는 경찰관에 대해서는 사후적 평가가 관용적이어야 하는데, 경찰관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사례가 많다”고 했다.

여경 무용론? 본질은 ‘훈련 부족’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는 ‘여성 경찰관 무용론’ 불거지는 데 대해서는 “사태의 본질이 아니다”라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지구대에서 근무하는 한 경감은 “여성과 남성의 문제가 아니라 현장에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경험과 훈련이 부족해서 생긴 문제다. 여경 무용론은 현장 상황을 모르고 하는 말”이라고 했다. 이웅혁 교수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공권력 사용을 과감하게 할 수 있도록 현장 습득과 교육훈련이 수반돼야 한다”고 했다.

22일 문재인 대통령은 대변인 브리핑을 통해 경찰의 부실 대응을 질타하면서도 이 문제가 젠더 갈등으로 번지는 것을 경계했다. 문 대통령은 “남경과 여경의 문제가 아니라 현장에 출동한 경찰의 기본자세와 관련된 사항”이라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교육 훈련을 강화하고 시스템을 정비할 것”을 경찰에 지시했다.

매뉴얼에 따라 적합한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직무 훈련이 이뤄져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훈 교수는 “삼단봉과 가스총을 얼마나 능숙하게 다루는지 등은 인사고과에 포함이 안 된다. 한 달에 두 번 현장 대응 관련한 직무교육이 있지만, 참석점수만 있고 직무교육 점수는 고과에 반영이 되지 않다 보니 유명무실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한번 경찰이 되면 5~10년 안에 재임용하는 제도가 필요하고 이 과정에서 현장 업무 수행 능력을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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