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따라 달라진 김환의 말(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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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일본은 긴 눈으로 한반도ㆍ아시아 보라
일본의 한 원로정객이 평양과 서울을 번갈아 드나들며 풍파를 일으키고 있다. 평양에 가서는 그쪽 사람들 듣기 좋은 이야기를 늘어놓고 서울와서는 정부 듣기 좋은 말로 북에서 했던 말을 「해명」하고 다시 동경으로 돌아가서는 자기가 한 말을 다시 뒤집는 희한한 말재주를 부리고 있다.
우리는 가네마루 신(김환신)씨의 그와 같은 말재주가 조화시키기 어려운 남북한과 일본의 이익을 정립시키려는 초기단계 탐색작업중 불가피하게 나온 외교술의 속성으로 봐줄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고는 보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정부가 가네마루라는 한 술사를 동원해서 시작하고 있는 정치작업이 90년대,나아가서는 21세기의 한일관계와 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를 다지기 위한 원대한 작업의 첫 단계라는 중요성에 비추어 일본은 처음부터 성실하고 진지하게 이에 임해야 된다는 점을 우선 강조하고자 한다.
당장의 장애를 회피하기 위해 여기 가서는 이 소리,저기 가서는 저 소리 식으로 얼버무린다면 머지 않아 그 진의가 노출되어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의 요인들이 3자관계를 오히려 악화시킬 우려가 있음을 경고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우리가 관심을 두고 있는 점은 일본이 북한에 접근하는 방식과 속도가 지금 공존과 통일의 길을 지향함에 있어 탐색단계에 있는 남북한 관계를 해치는 방향으로 나가고 있지 않나 하는 우려다.
남북한 관계개선속도와 일본의 북한 접근을 상관시키는 문제,대북 배상규모와 시기 및 그 사용처에 대한 규제,그리고 북의 핵개발 중단을 수교의 전제조건으로 삼는 문제 등이 모두 이러한 시각에서 의미를 갖는 것이다. 가네마루 씨의 여러갈래 발언을 보면 이들 핵심문제에 대해 전혀 신빙성이 없다.
우리는 그가 맡은 역할로 보아 동경에서 그가 한 말이 그중 가장 자신과 일본정부의 진의를 잘 반영하고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런 판단을 근거로 볼 때 일본의 진의는 남북한 관계의 순조로운 전개가 일본의 대북 접근정책에 큰 비중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외교란 자국 이익을 앞세우는 것이 철칙인 이상 이 또한 탓하기 어렵다. 그것은 우리가 경각심을 가져야 할 일이다. 그러나 21세기를 지향하는 아시아의 새 질서 구축에 있어서 무엇이 일본의 국익이냐는 데는 일본인 스스로도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세계가 경제중심의 블록화 속에서 민족주의 중심의 국가관계 동인이 이념의 구도를 밀어내고 있는 추세를 일본도 직시해야 된다고 본다. 유럽이 통합되고 미국 또한 신고립주의와 독자적 경제블록 형성으로 이에 대응하는 속에서 아시아도 결국 지역단위의 결속을 지향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이 추세는 과거 일본이 무력으로 추구하다 참패한 이른바 대동아공영권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 새 블록화 추세는 경제적 번영과 각 민족의 삶의 질을 높이는 노력을 주 목표로 삼고 이를 위해 지역 내부의 호혜적 협력강화를 통해 역외로부터의 경제력과 경쟁하는 것을 큰 흐름으로 삼게 될 것이다.
그와 같은 앞날을 상정할 때 일본은 과거처럼 분단된 한반도의 내부갈등을 추호라도 조장하거나 이의 해소를 방해하는 행동을 한다면 이는 자해행위다. 가네마루씨의 말장난이 풍기는 의구심을 풀고 일본의 대한반도 정책의 기본이 무엇인지를 명백히 할 책무가 일본정부에 있음을 우리는 지적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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