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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깃발’이 도처에 휘날리는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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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장정훈
장정훈 기자 중앙일보 팀장
장정훈 산업1팀장

장정훈 산업1팀장

“19세기 말 영국에는 붉은 깃발 법이 있었습니다. 자동차 속도를 마차 속도에 맞추려고 자동차 앞에서 사람이 붉은 깃발을 흔들었습니다. 증기기관 자동차가 전성기를 맞고 있었는데 영국은 마차업자를 보호하려고 이 법을 고수했고 결국 영국이 시작한 자동차 산업은 독일과 미국에 뒤처지고 말았습니다. 규제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2년 차였던 2018년 8월 규제를 혁파하겠다며 한 말이다. 서울시청 시민청에서 열린 ‘인터넷전문은행 규제혁신 현장방문’ 행사에 참석해 은산(銀産)분리는 금융의 기본원칙이지만 규제를 혁파해 신산업인 인터넷전문은행이 운신할 수 있는 폭을 넓혀줘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의 ‘붉은 깃발 법을 뽑겠다’는 이 약속은 또 하나의 공언(空言)으로 끝났다. 단적인 예로 문 정부에서 지난 4년간 발의된 규제만 3919건으로 박근혜 정부(1313건)의 3배에 달한다. 〈중앙일보 11월 15일 자 1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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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회룡기자

김회룡기자

규제 혁파는 지난 30년간 새 정부의 단골 구호였다. 진보든 보수든 규제를 혁파해야 기업이 투자하고, 경제가 성장하고, 소비가 살아나고, 고용이 늘어나는 선순환이 이어진다는 데 이견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영삼 대통령은 행정개혁쇄신위원회를 밀어붙였고, 김대중 대통령은 “프랑스혁명 때 기요틴(단두대)처럼 규제를 없애겠다”고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덩어리 규제를 혁파하겠다”고, 이명박 대통령은 “전봇대 규제를 뿌리 뽑겠다”고, 박근혜 대통령도 “손톱 밑 가시를 뽑겠다”고 했다. 그 뒤를 이어 문 대통령은 “붉은 깃발을 뽑겠다”고 공언했던 것이다.

그러나 문 정부뿐 아니라 모든 정권에서 규제 혁파는 실패했다. 공무원의 복지부동, 국회의 이익단체 눈치 보기, 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맞물린 결과다. 이번 정부에서는 여기에 실패한 이유가 더 있다. 바로 정책의 실패를 규제로 덮으려는 행태다. 부동산 정책 실패를 분양가상한제, 주택담보 인정비율(LTV) 대출규제, 그리고 임대차 3법(전·월세신고제, 계약갱신청구권제, 전·월세 상한제) 등으로 덮으려 한 게 대표적이다. 여기에 또 하나. 180석의 거대 여당은 그동안 논란 속에 미뤄졌던 상법·공정거래법·금융그룹감독법 등 기업 규제 3법을 밀어붙였다. 그 결과 이제는 도처에 붉은 깃발이 날리는 나라가 됐다. 지난 4년간 1만2000여개의 기업이 붉은 깃발을 피해 해외로 빠져나갔고, 일자리가 없는 청년들은 ‘취포족’으로 내몰렸다. 그런데 정부는 아직도 수십조원을 쏟아부어 만든 임시직 일자리로 눈가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