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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남기 국장이 홍남기 부총리에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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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조현숙 기자 중앙일보 기자
조현숙 경제정책팀 차장

조현숙 경제정책팀 차장

하루가 멀다 하고 “돈 주겠다” “세금 깎아주겠다”는 말이 여의도에서 흘러나오는 걸 보니 선거철이 다가오긴 왔나보다. 돌아가는 양상은 “묻고 더블로 가”를 외치는 영화 ‘타짜’는 저리 가라다. 승자가 모든 것을 가져가는 도박판(대선)에 올라온 판돈이 자기 돈이 아닌 나랏돈이란 점만 다를 뿐이다.

곳간지기 역할을 해야 할 기획재정부 안은 조용하기만 하다. 여야 대선 주자가 무차별 쏟아내고 있는 선거 공약에 얼마나 돈이 들지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다. 9년 전 있었던 일 때문이다.

19대 국회의원 선거를 두 달여 앞둔 2012년 2월 21일 기재부 산하 복지 태스크포스(TF)는 공약 분석 결과를 발표했다. 새누리당(현 국민의힘)과 민주통합당(민주당)이 내놓은 복지 공약 65개를 실행하려면 앞으로 5년간 최대 340조원이 들어간다는 내용이었다.

총선은 코앞에, 대통령 선거는 불과 10개월 뒤인 예민한 시기였다. 기재부의 공개 비판에 여의도 정계는 말 그대로 발칵 뒤집혔다. 정치권의 거센 반발에도 기재부는 멈추지 않았다. 양당이 공약을 확정하면 구체적인 대차대조표도 만들겠다는 경고까지 했다.

김회룡기자

김회룡기자

기재부를 가로막은 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였다. 복지 TF 3차 발표 바로 다음 날인 그해 4월 5일 선관위는 “공무원 선거 중립 의무를 명시한 공직선거법 제9조 위반”이라고 결정했다. 공직자 개인이 아닌 정부부처 대상으로 선거법 9조 위반을 적용한 첫 사례였다. 여야는 기다렸다는 듯 동시에 환영 성명을 냈다.

그래도 기재부 결기를 다 꺾진 못했다. 복지 TF를 이끌었던 기재부 정책조정국장이 직접 기자회견에 나섰다. “선관위 결정은 존중한다. 하지만 기재부는 최대한 노력했음에도 이와 같은 결정이 내려져서 아쉽다”고 말했다. 바로 그 국장이 지금의 홍남기 경제부총리다.

역대 최악의 빚잔치 대선을 앞두고 기재부는 유례없이 무력한 모습이다. 오차가 50조원에 이르는 엉터리 세수 추계로 여당으로부터 “국정 조사” 협박이나 받는 초라한 신세로 전락했다.

재선을 노린 현직 대통령의 포퓰리즘 공약에 반대해 장관, 예산국장 등이 줄줄이 사표를 던진 브라질 재무부의 기개까진 바라진 않는다. 선거법 위반하고 공약 분석하란 얘기가 아니다. 정부 동의 없이 예산 증액을 못 한다고 못 박은 헌법 57조는 뒀다 뭐하나. 여든, 야든 가리지 말고 안되는 건 안 된다고 해야 맞다.

2012년 홍남기 국장이 했던 말을 2021년 홍남기 부총리에게 그대로 전한다. “복지를 비롯해 국회에서 제기되는 문제에 대해 검토하는 것이 기재부의 일이다. 재정 당국으로서 해야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