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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번째 교육과정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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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천인성 기자 중앙일보 모바일24부디렉터(EYE)
천인성 EYE디렉터

천인성 EYE디렉터

현장 기자는 나름 중요하다 여겨 취재했지만, 독자의 관심이 높지 않아 지면에 실리지 못한 기사가 생긴다. 교육 분야를 담당했던 기자에겐 교육과정 개정에 관한 기사가 종종 그랬다. 교육계에선 교육과정을 ‘국가교육 설계도’라고 말한다. 설계도가 바뀌면 건물이 달라지듯, 교육과정을 개정하면 교과서와 교과목, 수업 내용, 과목별 시수, 시험과 성적 산출 등 학교 교육 전반이 바뀐다. 물론 입시제도와 교사 양성기관인 교대·사범대의 변화도 이어진다.

그런데도 도통 독자의 관심은 끌지 못한다. 손에 잡히지 않는 전문용어가 많을뿐더러, 눈앞의 입시에 매달려야 하는 학생·학부모 입장에선 ‘먼 미래’ 얘기라 그런 듯하다. 사실 정부가 개정에 착수해 학교에 실제 적용될 때까지 4년 이상 걸린다.

김회룡기자

김회룡기자

‘교육 수요자’의 무관심 속에 개정 논의는 ‘교육 공급자’만의 리그로 전락하곤 했다. 개정을 주도하는 정부, 학교가 ‘평생직장’인 교사·교원단체, 직·간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교수·학회들의 줄다리기에 그쳤단 얘기다. ‘지분’이 가장 큰 교육 당국은 집권세력의 이념·철학·공약을 반영하려 노력했다. 교사·단체·학회들은 자신의 교과목에 더 많은 수업시수를 배분받으려 다퉜다. 때론 다툼이 치열해져 “교육과정 개편은 이해관계가 얽힌 권력투쟁”(김신일 전 부총리, 2007년)이란 말까지 나왔다.

현재 진행 중인 ‘2022 개정 교육과정’ 논의도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10일 교총은 ‘교육 대못 박기 중단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교육부를 향해 “이념 카르텔이 추구하는 대립적·계급적 ‘민주시민’만 강조하지 말고 사회적 합의를 바탕으로 개정하라”고 요구했다. 정권 말기 대통령 공약(고교학점제)을 뒷받침하려 개정을 서두른다는 불만이 깔렸다. 과목 간 수업시수 배분을 둘러싼 파열음도 재연됐다. 지난달 사회 교과의 일반선택 과목을 9개에서 4개로 줄이는 안이 나오자, 4개 과목에 포함되지 않은 정치·경제·법 전공 교사와 교수들이 반발하고 있다. 한국사 필수 수업량을 현행 ‘6단위’에서 ‘5학점’으로 바꾸는 안에는 역사 교사들이 반대한다.

지난 4월 교육부는 “국민과 함께 미래 교육과정을 이야기하겠다”고 했다. ‘국민과 함께’란 표현을 두고 교육계에선 “과거와 달리 학생·학부모 의견을 중시하겠다는 의지”로 풀이했다. 이달 안에 새 교육과정 총론이 공개된다. 7차 교육과정(1997~2007) 이후 네번째 개정이니 11번째다. 이번 개정은 구태의연한 우리 교육을 디지털·인공지능(AI) 시대에 걸맞은 미래교육으로 바꿀 마지막 기회다. ‘국민과 함께’란 초심처럼, 공급자의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국민, 교육 수요자, 미래에 충실한 교육과정을 제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