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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과 겨울 사이 놓칠수 없는 맛" 고기도 제철이 있다 [백종원의사계MDI]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쪽파와 함께 먹는 예산 가을 한우

'백종원의 사계' 가을 예산 한우.

'백종원의 사계' 가을 예산 한우.

‘백종원의 사계 MDI’는 티빙(Tving) 오리지날 콘텐트인 ‘백종원의 사계’ 제작진이 방송에서 못다 한 상세한 이야기(MDI·More Detailed Information)를 풀어놓는 연재물입니다.

오래전 몽골을 방문했을 때의 일. 인적이 드문 초원 한복판에서 불을 지피고 바비큐 준비를 하고 있는데, 몽골인 가이드가 어디론가 사라졌나 했더니 뭔가 낯익은 식물을 한 아름 안고 나타났다. 몽골 사람들의 표현으로는 “고기를 많이 먹게 해 주는 풀”이라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누가 봐도 야생 실파였다. 신기해서 몽골 사람도 파를 먹냐고 했더니 씩 웃으며 그 자리에서 실파 한 촉을 돌돌 말아 입에 넣고 와삭와삭 씹어먹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농사라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던 시절에도 사람들은 고기를 먹을 때, 어떤 초록색 풀을 같이 씹어 먹으면 입안이 상큼해지고 식욕이 두 배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 각 지역의 사계절 풍광과 제철 식재료를 함께 소개하는 '백종원의 사계'는 티빙(Tving)에서 볼 수 있다.

우리나라 각 지역의 사계절 풍광과 제철 식재료를 함께 소개하는 '백종원의 사계'는 티빙(Tving)에서 볼 수 있다.

그 인연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굵은 대파에서 가느다란 실파와 쪽파, 그리고 사촌격인 부추에 이르기까지, 아린 맛을 내는 이 녹색 식물은 오늘날 한국 음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료다. 간혹 실파와 쪽파가 똑같은 것인 줄 아는 분들도 있는데, 흰 뿌리가 양파처럼 동그랗게 끝나는 것이 쪽파고 그냥 일자로 내리꽂히는 것은 실파라는 점을 알고 있으면 헷갈리지 않는다.

쪽파와 실파는 생김새는 거의 비슷하지만 맛과 쓰임새는 살짝 다르다. 쪽파는 인위적으로 양파와의 교잡을 통해 만들어진 종이기 때문에 진액이 많고 끈끈한 식감이 있는 반면, 실파는 진액이 적고 깔끔한 맛이 난다. 따라서 파김치나 파무침은 쪽파로 담그는 게 맛있고, 실파로는 파전을 부치거나 강회를 해 먹는 게 일반적이다.

'백종원의 사계' 가을 예산 한우.

'백종원의 사계' 가을 예산 한우.

사실 파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는 건 그만큼 파가 한국 음식에서, 특히 고기와 함께 먹을 때 중요한 식재료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고, 이다음에 나올 이야기에 대한 변명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다들 아시다시피
‘백종원의 사계’는 제철 음식을 어디서, 언제, 어떻게 해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는지를 안내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제철’에 전념하다 보면 거의 모든 메뉴를 해산물로 해야 할 것 같은 위기감이 든다는 것이다.

사계절이 선명한 한국에서 가장 계절에 민감한 식재료는 농-임산물과 해산물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제철 음식’이라고 할 때에는 ‘끼니가 되는 음식’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주재료는 해산물이 되기 쉽다. 수많은 농산물이 있지만 ‘끼니가 되는 음식’이라는 전제하에 한 회의 주제로 다룰 수 있는 식재료는 많지 않다. ‘백종원의 사계’ 사과 편, 대추 편, 귤 편을 구성해 보시라. 만만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항상 음식 프로그램을 만드는 제작진은 지글지글 타오르는 불판 위에서 익어가는 고기를 찍고 싶어한다. 그런데 고기에도 제철이 있을까….?

'백종원의 사계' 가을 예산 한우.

'백종원의 사계' 가을 예산 한우.

놀랍게도 예산 한우 조합에서는 “있다”는 대답을 해왔다.
“정말입니까?”
“그럼유. 있쥬. 통상 가을에서 겨울 넘어갈 때가 제일 맛있는 것 같아요.”
“무슨 근거가 있나요?”
“모든 동물은 여름 지나서 겨울을 앞두고 몸에 살을 찌우잖유. 추위에 견딜 수 있도록 기름을 채우는 거. 천고마비(天高馬肥)라는 말도 있고….”
“천고마비는 말인데요.”
“….뭐 아무튼, 말이나 소나, 기름이 자작하게 오른 고기가 맛있쥬. 우리가 늘 잡아 보고 먹어 보니 그류. 드셔 보시면 알 텐데?”

이 답변 내용을 놓고 제작진 안에서도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과연 ‘가을 한우’를 ‘제철 음식’으로 다뤄도 좋을 것인가? 놀랍게도 대부분 긍정적인 반응이었다. 물론 이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성 뒤에는, 한우를 아이템으로 다루면 혹시 남는 한우는 제작진 식사용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항상 모든 예측은 빗나간다.)

'백종원의 사계' 가을 예산 한우.

'백종원의 사계' 가을 예산 한우.

그다음 진행은 일사천리. 일단 한우를 아이템으로 삼은 만큼, 기왕이면 백종원 대표의 고향이자 대표적인 한우 산지인 예산을 목적지로 정했다. 하지만 이걸로는 충분치 않다. 대한민국에 한우 산지가 어디 한둘인가. 왜 예산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필요하다.
“혹시 예산분들은 고기 드실 때 뭘 같이 많이 드시나요?”
“뭐 특별한 게 있나…. 가을엔 파쥬.”
“파요? 파무침은 전국 어디에서나 먹는 거 아닌가요?”
“아 모르시는구나. 예산이 전국 최고 쪽파 산진데.”

그랬다. 예산에는 ‘쪽파 연구회’도 있고, 예산읍 장소리는 마을 단위로는 전국 쪽파 생산량 1위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쪽파를 곁들여 소고기를 굽자”는 말에 백종원 대표는 당연히 반색했고, 그렇게 해서 ‘백종원의 사계’ 가을 네 번째 이야기는 ‘쪽파와 한우’ 편이 되었다.

물론 백종원 대표가 소고기를 한두 번 먹어봤을 리 만무한 일. “그냥 등심이나 안심은 너무 뻔하니까 오늘은 특수부위를 해 보지?” 산지의 한우구이 전문점에 가면 등심, 안심, 불고기와 함께 조그맣게 ‘특수부위’라는 이름이 메뉴 한구석에 쓰여있다. 늘 궁금하셨던 분들도 많았을 것이다. 대체 특수부위가 뭐길래.

'백종원의 사계' 가을 예산 한우.

'백종원의 사계' 가을 예산 한우.

이날 준비한 특수부위는 세 가지였다. 제비추리, 치마살, 그리고 안창살. 세 부위 모두 소 한 마리에서 1㎏ 미만으로 나오는 부위들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동물의 고기는 목살, 등심, 안심, 갈비, 뱃살 등으로 크게 나눠지는데 소는 워낙 큰 동물이다보니 같은 등심이라 해도 머리 쪽과 꼬리 쪽의 맛이 다르고, 위쪽과 아래쪽도 다르다(고 한다). 아무래도 각 부위의 고기 맛은 소를 잡아 정형(도축된 소를 부위별로 잘라 상품화하는 작업)하는 분들이 제일 잘 알기 마련인데, 그분들이 그 큰 소의 몸에서도 별난 맛이 나는 몇몇 부위에 이름을 붙여 그 독특한 상품성을 인정한 부분들이 오늘날 특수부위의 시작인 셈이다.

소의 몸 안에서의 위치를 보자면 제비추리는 소 몸통 앞쪽의 갈비와 등심 사잇살, 치마살은 등심 맨 뒤쪽, 그러니까 소의 허리에서 배 아래 쪽으로 내려온 부분, 그리고 안창살은 소의 횡격막 부분, 그러니까 갈비와 양지 사이에 있는 살이다. 이 부위들은 따로 유통하기 힘들고, 변색도 빠르기 때문에 한우 산지나 도축장 부근에서나 맛볼 수 있다. 발품을 파는 게 좋은 이유.

'백종원의 사계' 가을 예산 한우.

'백종원의 사계' 가을 예산 한우.

제비추리는 기본적으로 근육이기 때문에 기름기가 적은데도 고소한 맛이 강한 것으로 유명한 부위. 치마살은 소가 치마를 입었다고 가정할 때 스커트가 가리는 부분, 즉 허리 주위의 배 쪽 살들이라 살짝 기름기가 있고 구수한 부위, 그리고 안창살은 세로로 기름이 끼어 가장 강력한 지방의 맛을 내는 부위다. 그래서 굽는 법도 다르다. 제비추리는 불판에 올리면 금세 달라붙기 때문에 얇게 썰어 살짝 구운 뒤 바로 먹어야 하지만 안창살은 불에 올려놓으면 어느새 기름이 나와 자글자글 끓으며 익어간다. 백종원 대표가 늘 강조하는 “고기는 자기 기름으로 익은 놈이 제일 맛있다”의 표본 같은 고급 부위다.

소고기를 먹을 때에는 날것에서 익은 것으로, 그리고 기름기가 적은 부위에서 많은 부위의 순으로 먹는 것이 상식. 그래서 백종원 대표는 채끝 생고기로 입맛을 돋운 뒤 제비추리-치마살-안창살의 순으로 공략해 들어갔다. 밤은 깊어 가고, 철판에서 고기는 익어 가고, 금방 만든 둔 예산 쪽파 무침 한 젓가락에 고기 한 점, 또 파무침 한 젓가락에 고기 한 점….

'백종원의 사계' 가을 예산 한우.

'백종원의 사계' 가을 예산 한우.

굽다 남은 소고기와 쪽파는 바로 한우 된장찌개의 재료가 된다. 파, 고기, 된장만 있어도 찌개는 충분하지만 방금 전까지 안창살이 익어 가던 철판에 눌어붙은 단백질과 지방을 버려선 안 된다. 이른바 서양 요리에서 디글레이징(deglazing)이라고 말하는 기법. 철판에 붙은 재료를 물까지 부어 싹싹 국물에 투입하는 것이 포인트다. 그렇게 해서 보글보글 끓은 된장찌개 한 사발을 떠 놓고, 예산 쪽파로 담근 파김치를 흰 쌀밥에 얹어 먹는 맛이란… 한국 사람들이 실컷 고기를 지글지글 구워 먹은 뒤에도 “자, 이제 식사하셔야죠” 하는 말을 거부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렇게 예산의 밤은 깊어 간다.

P.S. 제작진은 과연 한우 맛을 볼 수 있었을까요, 없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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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원섭 (JTBC 보도제작국 교양담당 부국장. 다양한 음식과 식재료의 세계에 탐닉해 ‘양식의 양식’, ‘백종원의 국민음식’, ‘백종원의 사계’를 기획했고 음식을 통해 다양한 문화의 교류를 살펴본 책 『양식의 양식』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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