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쓰는 일 적은 시대, 춤이라도 살려야 지능·신체 균형”

중앙선데이

입력 2021.11.13 00:20

업데이트 2021.11.15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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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2호 10면

[SPECIAL REPORT]
백댄서, 주인공이 되다

이날치 ‘범 내려온다’로 만든 한국관광공사 홍보영상. [중앙포토]

이날치 ‘범 내려온다’로 만든 한국관광공사 홍보영상. [중앙포토]

‘주인공’이 된 최고의 춤꾼들은 현대무용단체인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다. 지난해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에 맞춘 기상천외한 의상 코드와 ‘세상 힙한’ 안무로 한국관광공사 홍보영상 조회 수 3억뷰 돌파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더니, 올해는 세계 최고의 팝밴드 콜드플레이와의 협업으로 화제를 모으고, 명품 브랜드 구찌 홍보 영상에도 출연했다. K팝의 위상 변화와 함께 해외에서 한국 안무가를 찾게 된 대표 사례다.

가장 비주류 예술인 현대무용 분야에서 글로벌 스타가 탄생한 셈인데, 예술감독 김보람(38)의 이력을 보면 납득이 간다. 2000년대 초반 엄정화·이정현 등 유명 가수의 백업댄서를 하다 현대무용가로 전향해 대중적인 감각이 몸에 배어 있다.

최근 이들을 모시기 위해 지역문화재단들이 뭉쳤다. 고양·춘천·천안·포항의 문화재단들이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의 지원을 받아 이들의 신작 ‘얼이섞다’를 공동으로 제작한 것이다. 민간 무용단체의 신작을 위해 지역문화재단들이 힘을 합친 것은 국내 최초다. 12~13일 춘천문화예술회관을 시작으로 19~20일 고양어울림누리를 거쳐 25~26일 포항문화예술회관, 12월 3~4일 천안예술의전당까지 투어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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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히트 이후 콜드플레이 ‘Higher Power’의 댄스버전 뮤직비디오까지 찍은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 [중앙포토]

글로벌 히트 이후 콜드플레이 ‘Higher Power’의 댄스버전 뮤직비디오까지 찍은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 [중앙포토]

“너무 감사하고 뷰티풀한 일이죠. 보통 한국에서 6개월 동안 신작을 만들어 올리면 이틀 공연하고 끝이거든요. 방송댄스도 한 곡 연습하면 몇 달 공연하는데 말이죠. 신작을 만들기 전부터 1년 치 투어를 잡는 유럽 시스템이 부러웠는데, 이번에 처음으로 비슷한 경험을 하네요. 한국이 문화예술 쪽으로 점점 발전하고 있으니, 다른 단체들도 이런 기회가 많아졌으면 해요.”

제목인 ‘얼이섞다’는 ‘어리석다’의 어원으로, ‘얼이 썩었다’는 부정적 의미를 ‘얼을 섞다’라는 긍정적 의미로 해석했다. MBC 라디오 ‘우리의 소리를 찾아서’가 채집한 향토민요를 그대로 활용해 잊혀져 가는 옛 소리와 요즘 가장 힙한 앰비규어스의 춤이 만나는 미래지향적인 무대다.

“옛날 라디오에서 들은 소리들이 늘 머릿속에 있었어요. 일하면서 당신들끼리 편하게 부르던 순수한 소리들이 이젠 다 사라져 버렸는데, 너무 아깝고 안타깝잖아요. 그 소리 그대로 살리고 테크노 장면을 더해 현대적 감성의 문화로 다시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봤죠. 낯설다 싶다가도, 현대적인 분위기와 잘 어울리고 흥겹다고 느끼실 겁니다.”

앰비규어스는 ‘범 내려온다’ 이전에도 ‘피버’ 등 한국적 작업을 꾸준히 해왔다. 모든 작업에 한국 노래를 꼭 넣었고, 대표작 ‘바디콘서트’의 커튼콜은 아리랑이다. “딱히 전통을 해석하고 표현해야 한다는 생각보다 제가 좋아해서 그래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죠. 요즘 너무 힙합이나 서양문화를 선호하는 경향인데, 이런 소리도 진짜 좋단 걸 알리고 싶어서요. 저도 재밌고요.”

비트가 없고 장단만 있는 우리 소리가 현대무용을 추기에 힘겨울 것 같지만, 그게 오히려 관전포인트란다. “그래서 더 재밌어요. 요즘 음악은 박자가 정해져 있고 그걸 지켜야 맞는데, 이분들은 자기 흥을 매번 새롭게 만들어내니까. 정해진 리듬이 없을 때 나오는 매력을 더 잘 보여주는 안무를 짰어요. 호흡이 확 바뀌거나 일정하지 않은 리듬을 잘 캐치해서 움직임으로 표현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습니다.”

12일부터 신작 ‘얼이섞다’ 공연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의 신작 ‘얼이섞다’는 민간무용단 최초로 4개 지역문화재단이 공동제작했다. [사진 고양문화재단]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의 신작 ‘얼이섞다’는 민간무용단 최초로 4개 지역문화재단이 공동제작했다. [사진 고양문화재단]

전남 완도 출신인 그는 자연에서 뛰놀다가도 혼자 있을 때면 TV 가요 프로그램을 보며 현진영, 서태지를 따라 춤을 췄다. “어려서부터 은근히 현실적이라, 공부를 못하니 빨리 고등학교 졸업하고 장사할 생각이었어요. 장사를 하면서 좋아하는 춤을 취미로 계속 춘다는 설계를 해놨죠. 고등학교 때 처음 서울에 놀러와 피플크루라는 댄스팀 공연을 우연히 봤는데,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서울로 전학 와서 프렌즈라는 방송댄스팀에 들어갔죠. 아마 피플크루 공연을 못 봤다면 지금 완도에서 장사하고 있을 걸요.(웃음)”

백업댄서로 일하면서도 대학에서 현대무용을 전공했다. 미국에 가서 ‘마돈나 백댄서’가 되려고 대학에 간 것이란다. “그때는 엔터테인먼트 쪽에서 댄서라는 직업이 피라미드 가장 아래에 있었죠. 불합리한 대우가 자연스러웠고, 그래서 미국으로 가고 싶었어요. 시스템이 잘 돼 있으니 댄서로서 자부심을 갖고 일할 수 있을 테니까. 비자를 받으러 대학 무용과에 들어가 보니, 내 작품을 만든다는 게 매력 있더군요. 방송댄스는 정해진 음악, 가수에 맞춰야 하니까요. 그 시절 방송은 굉장히 치열해서 살아남기 위해 이 악물고 춤을 췄는데, 그때 길러진 경쟁력 덕분에 아직까지 춤추고 있는 것 같아요.”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의 신작 ‘얼이섞다’는 민간무용단 최초로 4개 지역문화재단이 공동제작했다. [사진 고양문화재단]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의 신작 ‘얼이섞다’는 민간무용단 최초로 4개 지역문화재단이 공동제작했다. [사진 고양문화재단]

백업댄서 출신으로 최근의 ‘스우파 현상’에 격세지감도 느낄 터. ‘댄서’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예술에 도전하는 것이 현대무용가들에게 위협이 되진 않을까. “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댄서들이 다양한 방법으로 관객을 매료시키는 것이잖아요. 스트릿이 눈요기를 넘어 그 안에 스토리를 담고 각자 표현하는 이유가 있다면 좋은 현상이죠. 우리도 장르를 구분 짓지 않거든요. 벽을 넘나드는 건 무용가의 능력에 달린 것 같아요. 위기라 느끼는 무용가들이 있다면 열심히 하셔야죠.(웃음)”

그럼 무용과 댄스는 아무 차이 없는 걸까. 그가 말하는 차이는 공연의 형태다. “무용은 당장 1분을 만족시키기 위한 춤이 아니라 1시간 동안 이야기를 만들어서 소통하는 거니까요. 춤을 추냐 안 추느냐를 떠나 미술작품처럼 작가가 무엇을 전달하고 싶고, 그 방법을 찾는 것 자체가 작업이죠. 스우파 파이널에서 아이키의 작업을 확장해서 1시간 동안 극장에서 한다면 현대무용이라 생각해요. 춤이란 걸 1시간 동안 스토리 없이 본다는 건 마치 아프리카인과 1시간 대화하는 것과 똑같아요. 그럴 때 말이 아니라 뭘 표현하는지 집중하게 되는데, 그게 무용을 보는 방식이죠.”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의 신작 ‘얼이섞다’는 민간무용단 최초로 4개 지역문화재단이 공동제작했다. [사진 고양문화재단]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의 신작 ‘얼이섞다’는 민간무용단 최초로 4개 지역문화재단이 공동제작했다. [사진 고양문화재단]

하지만 ‘댄스’의 한계도 있다. 특히 방송댄스는 가수와 댄서가 나뉠 수밖에 없고, 대중에게도 그런 시선이 자연스럽다. 앰비규어스가 방송 출연을 최소화하는 이유다. “우리가 아무리 이날치와 협업했지만, TV를 보시는 분들은 이날치 백댄서라 생각하겠죠. 엔터테인먼트에서는 댄서가 뒤에 서는 게 당연한 문화니까요. 콜드플레이와도 그걸 우려했는데, 따로 댄스버전 비디오를 만들자고 할 정도로 협업으로 생각하더군요. 크리스 마틴은 작업하면서 춤을 춘 게 처음이라고, 진짜 좋아하면서 재밌게 잘했어요. 그 정도로 협업 마인드가 있으니까 했던 것이지, 가수 뒤에서 백업해주는 일을 할 마음은 없습니다.”

‘앰비규어스’란 이름도 스스로 정체성에 대한 고민에서 비롯됐다. “무용 안무를 시작할 때, 방송과 스트릿을 훨씬 오래 한 사람으로서 과연 내가 추는 춤이 현대무용처럼 보일까, 애매하게 보이지 않을까 생각도 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애매한’ 춤을 추면서도, 나름 현대무용계 거장 안성수에게 배운 정통파다. “안 선생님 밑에서 무용작업을 제대로 배웠어요. 발레를 정말 좋아하게 만들어주셨는데, 한국무용을 하려면 전통춤을 알아야 하듯이 현대 장르에 속하려면 발레를 알아야 하거든요. 발레 자체가 과학적으로 이뤄진 신체훈련이라, 덕분에 몸을 쓰는 메커니즘을 이해하게 됐죠.”

춤 추는 게 말하듯 자연스러워져야

대중들은 그의 춤에서 재미를 발견하지만, 의도한 건 아니다. 관광버스 막춤처럼 쉬워 보여도 따라하기 어려운 춤은 반골 기질에서 나왔다. “자연스러운 걸 거부하는 경향이 있어요. 다들 오케이라고 할 때 ‘왜 다 오케이지?’ 이런 질문을 던지는 버릇이 있거든요. 움직임을 만들 때도 자연스럽게 나오는 방향보다 다른 건 없나 생각하죠. 그러다 보니 독특한 움직임이 나오는 것이지, 재미를 위한 장치를 고민하는 건 아니에요. 무용이란 건 보는 사람 감정에 따라 다르게 보이고, 내 작업이 어떤 거냐를 넘어서 보는 사람이 분위기를 이끌기도 하니까. 저는 그저 제자리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연구할 뿐입니다.”

‘범 내려온다’로 뜬 것도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더라”면서도 “다만 춤을 추는 이유라면, 많은 사람들이 춤을 보러 가고, 춤을 추게 됐으면 한다”는 게 그의 말이다. “몸짓이란 게 고유의 언어고, 원시시대부터 춤인지도 모른 채 춤을 춰왔잖아요. 지금은 기분 좋아서 몸을 움직이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는데, 그런 개념에서 벗어나 춤추는 게 말하듯이 자연스러워지면 좋겠어요. 특히나 기술이 발전해 몸 쓰는 일이 점점 없어지는 상황에서 춤이라도 어떻게든 살려야 지능과 몸이 균형을 잘 이루지 않을까요.”

중앙SUNDAY 유튜브 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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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우파’로 춤에 쏠린 관심은 기회일 수 있다. 무용교육혁신위원회 홍보대사이기도 한 그는 매체의 힘을 떠나 이제 많은 사람이 고민해야 할 부분이라고 했다. “방송은 재미를 위해 만들지 문화의 방향성까지 제시하지 않잖아요. 춤도 교육으로 차근차근 이뤄져야 해요. 어려서부터 노래 교육을 받으니 노래방에 자연스럽게 가는 것처럼, 스트레스 풀러 500원짜리 댄스방에 갈 수도 있겠죠. 교육을 통해 이뤄져야지 예능 프로 하나로 되는 일은 아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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