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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있고 신난다” 댄서 배틀 ‘스우파’ 영상 3억 6000만 뷰…춤 전성시대 활짝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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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2호 08면

[SPECIAL REPORT]
백댄서, 주인공이 되다 

‘스우파’ 파이널에서 노제(가운데)가 안무한 ‘헤이마마’를 추는 각 크루 리더들. [사진 Mnet]

‘스우파’ 파이널에서 노제(가운데)가 안무한 ‘헤이마마’를 추는 각 크루 리더들. [사진 Mnet]

“K댄스 배우러 미국에서 왔어요.” 9일 저녁 서울 성동구의 댄스학원 원밀리언 댄스 스튜디오에서 만난 샬럿(23). 그는 댄서가 되기 위해 매일 수업을 받는다. “한국인들은 춤을 열심히 춥니다. 같이 배우면 더 잘 습득할 수 있을 것 같아 여기까지 왔어요.” 고려대 교환학생인 미국인 엘리사(22)도 지난 8월 한국에 온 직후부터 이곳을 매일 찾고 있다. 그는 “미국에는 집 근처에 전문 댄스 학원이 없다. 금전적으로 부담되긴 하지만 춤을 배우기 위해 돈을 쓰는 건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K팝에 이어 K댄스 열풍이 분다. 유튜브 국내 최대 구독자(2450만)를 보유하고 있는 원밀리언 댄스 스튜디오는 K댄스의 성지다. 춤을 가르치는 댄서만 40여명. 매주 30여 개 클래스에 1000명이 넘게 수강 중이다. 오후 6시에 도착하니 이미 두 개 클래스가 진행되고 있다. 7시 수강자들이 자기 물병을 세워두는 방법으로 줄을 선다. 앞자리를 차지하려 2시간 전에 오는 사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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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뱅’의 리더 허니제이. [사진 Mnet]

‘홀리뱅’의 리더 허니제이. [사진 Mnet]

일찌감치 줄을 선 대학생 이유란(21)씨는 “댄서와 가까운 곳에 서야 집중이 잘된다”면서 “3년 간 배우다 쉬고 있었는데 ‘스우파’ 이후 다시 시작했다. 노제의 ‘헤이마마’ 같은 걸 보면 사람들이 왜 열광하는지 알 수 있다. 멋있고 신나니까”라고 말했다. 아이돌 연습생에서 전향해 이날 원밀리언과 댄서 계약을 맺은 일본인 레난(25)도 “스우파를 통해 댄서를 직업으로 존중해주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 같다. 전문 댄서가 되고 싶어 한국에 오려는 외국인도 많다”고 전했다.

‘스우파’란 최근 종영한 Mnet 댄스 서바이벌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약칭으로, 요즘 부는 춤바람의 진원지다. 스트릿 씬에서 실력 있는 여성 크루들이 총출동해 자존심을 건 배틀 열전을 펼쳤는데, 8월 24일 첫 방송 이래 10주 연속 비드라마 부문 화제성 1위, 콘텐츠 영향력 지수 종합 부문과 예능 부문 10주 연속 1위를 기록하며 방송계 최대 이슈로 떠올랐다. 관련 유튜브 영상의 누적 조회 수는 3억 6000만뷰를 넘었다. 20일 열리는 서울 콘서트는 티켓 오픈 1분 만에 매진됐고, 11월 말 스핀오프 프로그램인 ‘스트릿 걸스 파이터’가 편성돼 이 열기는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스우파’는 하나의 사회현상이 됐다. ‘유퀴즈 온 더 블록’ ‘집사부일체’ 등 인기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도 이들 댄서들로 도배됐고, K팝 퍼포먼스 채널인 ‘스튜디오 춤’도 가수 없이 댄서들을 주인공 삼은 콘텐트를 만들기 시작했다. 댄서들은 광고계도 접수했다. 식음료부터 화장품, 휴대폰, 자동차, 명품 광고까지 춤판이 되고 있다. 무려 9개 브랜드의 모델이 된 노제의 경우 200만원이던 몸값이 1억5000만원으로 치솟아 순식간에 10억대 수익을 올린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이런 일은 없었다. 가요계를 댄스곡이 점령한 지 오래지만, 노래와 가수가 아닌 춤과 댄서가 화려한 조명을 받는 것은 처음이다. 댄서들의 과거 영상이 역주행하고, 몬스터엑스 출신 원호의 신곡 무대는 우승팀 홀리뱅의 리더 허니제이가 ‘엔딩 요정’을 함께 하기도 했다. 출연자뿐 아니라 댄서씬 전체가 축제처럼 들썩였다. 제이블랙 등 전문적인 리뷰 영상을 올린 댄서들도 함께 주목받았고, 왁킹·크럼프·락킹·브레이킹 등 스트릿 댄스 전문 용어는 상식이 됐다.

춤으로 성평등을 이루다

‘프라우드먼’의 리더 모니카. [사진 Mnet]

‘프라우드먼’의 리더 모니카. [사진 Mnet]

‘스우파’가 대중을 사로잡은 킬링포인트는 이상적인 여성상을 뒤집은 데 있다. “잘 봐, 언니들 싸움이다”(허니제이), “나는 절대 지지 않아, 얘들아”(모니카) 같은 전투적 유행어 탄생이 상징적이다. 미국 빈민가에서 이민자들간 패권 다툼으로 시작된 스트릿댄스의 배틀 문화를 그대로 가져와, ‘파이터’로 등장한 센 언니들의 사이다 입담과 한 치 양보 없는 승부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연예인 비주얼’이 아닌 옆집 언니같은 인간적인 외모를 주체적으로 과시하는 최첨단 젠더 코드가 세대불문 여성들에게 뜨겁게 사랑받았다. 파이널에서 “스우파 댄서들, 졸○ 멋있다”며 비속어를 생방송에 여과없이 노출시킨 아이키, 종방 간담회에서 “‘예쁘다, 섹시하다’가 아니라 ‘멋있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는 허니제이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요컨대 춤으로 성평등을 이룬 것이다. 이영미 대중문화평론가는 “스트릿댄스라는, 여성이 열세인 영역에 여성만 모아놓고 최고 기량을 보여준 점이 차별점”이라면서 “스우파는 여성과 춤이 결합했을 때 상상하게 되는 기본적인 편견을 깨버렸다. 축구예능 ‘골때리는 그녀’처럼 여성의 강인한 몸을 드러내는 예능 트렌드 선상에 있지만, 고정적인 여성성의 굴레가 훨씬 강한 춤의 영역에서 깨고 나오는 발견의 즐거움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훅’의 리더 아이키. [사진 Mnet]

‘훅’의 리더 아이키. [사진 Mnet]

조지선 연세대 객원교수(심리학 전공)도 “우리 모두는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을 스스로 수용해 악영향을 받는 ‘고정관념 위협’에 시달린다”면서 “스우파 댄서들은 ‘춤이나 추는 여자들’이라는 고정관념의 피해자가 되기를 거부했다. ‘나는 멋진 사람이다. 남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내 열정에 책임진다’는 메시지를 온몸으로 전하는 댄서들에게 대중이 카타르시스를 느낀 것”이라 분석했다.

사실 스트릿댄스는 춤 자체가 해방감을 준다. 무기 없이 싸움을 대신하는 공격적인 춤동작은 ‘예술무용’이 규정하는 보수적인 미의 기준을 깨부순다. 순수예술로서의 무용이 엄격한 형식을 따르거나 무용가의 내면을 몸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라면, 스트릿댄스는 몇 가지 ‘루틴’을 활용해 음악적 요소를 자유롭게 몸으로 표현하는 즉흥적인 춤이다.

장인주 무용평론가는 “‘비보이’라는 용어가 ‘break’에서 파생되었듯이 스트릿은 반항과 폭력 등이 기본 표현형태라 예술 무용의 우아함과 대조적이다. 과격한 움직임을 통해 저항의식을 즐거움으로 표현하는 정서”라면서 “스트릿의 미학은 무엇보다 공동체 의식에 있다. 똑같은 동작을 추기도 하지만 각자 추더라도 자유와 해방을 표현하기에 보는 이에게도 공감대가 큰 21세기 대중 춤이 됐다”고 분석했다.

스트릿댄스에 즉흥적인 프리스타일만 있는 건 아니다. 개성과 전문성을 녹여 자기 색깔을 표현하는 퍼포먼스 안무는 예술의 경지다. ‘스우파’ 출연진도 걸스힙합의 원조로 추종받는 허니제이, 스트릿과 라틴을 퓨전한 아이키, 크럼프에 기반해 폭넓은 스펙트럼을 자랑하는 모니카 등 저마다 색깔이 뚜렷하다.

K댄스는 한류 열풍에도 한몫하고 있다. ‘스우파’ 리더 계급 미션곡 ‘헤이마마’ 댄스 챌린지가 이어지며 틱톡 해시태그는 2억건을 돌파했다. 사실 K팝 전성기에 K댄스가 시너지를 낸 건 꽤 됐다. 2011년 파리 루브르박물관 앞에서 SM가수들의 연장공연을 요구한 플래시몹 이후 유럽 길거리에서 K댄스 커버 열풍이 시작됐다. 유튜브를 통한 음악 소비 급증으로 ‘듣는 음악’에서 ‘보는 음악’으로 가는 추세 속에서 댄스의 비중은 점점 커지고, 스트릿댄서들도 ‘K팝 안무가’로 거듭났다.

엔터업계 밑바닥서 예술가 반열로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사실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댄서의 위상은 아주 낮았다. K팝 안무가 배윤정이 개인 유튜브 채널에서 “우리 땐 댄서들이 대기실도 없이 방송국 복도나 계단 밑에 돗자리 깔고 쉴 정도로 무시당하는 직업이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런데  ‘스우파’ 게스트로 출연했던 싸이가 “앞으로 댄서들이 대접받게 될 것”이라고 예견했듯, 지금 엔터산업은 지각 변동 조짐을 보이고 있다. ‘스우파’ 파이널 무대를 위해 각 크루에 헌정된 곡들은 최초로 댄서들이 음원 수입 일부를 갖게 됐다. 댄서들은 (사)안무창작가협회 출범을 추진 중인데, 기획사 귀속이 당연시되던 안무 저작권 문제 해결에 나설 예정이다.

모니카가 SNS를 통해 “댄스는 즐거움 그 이상의 것을 담을 수 있는 예술이다. 댄서들의 사회적 가치를 올리고 싶다”고 했듯, ‘무용’과 ‘댄스’의 경계도 흐려지고 있다. ‘스우파’ 맨오브우먼 미션에서 모니카가 젠더 개념을 파괴한 무대나, 파이널 미션에서 아이키가 “말로 하기 어려운 걸 무대로서 느낄 수 있게 하고 싶다”면서 엄마를 주제삼은 무대는 한편의 현대무용같은 울림을 줬다. 지난 8월 국립현대무용단이 스트릿댄서들을 동원해 신작 ‘힙합’을 선보이고, 앰비규어스 댄스컴퍼니가 이날치, 콜드플레이와의 콜라보를 한 것도 그런 지형 변화를 상징한다.

무용계 내에서도 ‘실용무용’의 이름으로 댄스의 위상이 약진하고 있다. ‘실용무용’은 2000년대 스트릿댄스가 제도권 교육으로 진입하면서 기존 시스템과 구별되는 카테고리로 등장했는데, 브레이킹이 2024년 파리 올림픽 정식종목으로 채택되고, 한국 댄서들이 국제 대회를 휩쓸면서 대입을 앞둔 청소년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한편 4년제 대학 무용학과는 통폐합 추세다. 한때 전국 48개 대학교에 설치됐던 무용학과는 2010년대 이후 지방대학에서 폐지 바람이 불면서 현재 33개 대학만 남았다. 대학들은 전공자들이 활동할 장이 부족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실용무용을 적극 끌어안고 있다. 올해 실용무용전공을 개설한 한체대를 비롯해 4년제 대학 무용학과는 전공영역에 실용무용을 포함시키고 있고, 전문대 무용학과들도 실용무용 위주로 신입생을 모집한다. 2008년 서울종합예술실용학교에 처음 개설된 ‘스트릿댄스 전공’은 현재 40여개 대학에 개설되어 있다. 모니카, 허니제이, 아이키 등은 ‘교수님’이다.

이런 현실에 무용계도 ‘무용의 정의가 달라졌다’고 인정하는 분위기다. 장인주 평론가는 “2013년 Mnet ‘댄싱9’ 이후 서서히 스트릿까지 컨템포러리로 받아들이려던 추세가 ‘스우파’로 선을 훅 넘었다”면서 “이런 현상은 무용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데, 프랑스가 가장 앞장서고 있다. 힙합 댄서가 국립안무센터 예술감독이 되고, 서커스학교 출신에게 현대무용을 만들도록 전폭 지원하니 무용 관객이 늘어나고, 파리 올림픽 종목 선정까지 이어졌다. 국제 대회를 휩쓸고 있는 우리도 이 흐름을 타야 한다”고 주장했다.

‘스우파’로 인한 댄스 열풍에서 춤의 무게중심이 이동하는 트렌드를 읽을 수도 있다. 근대 이후 춤이 발레와 현대무용 등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는 독립적인 예술의 지위를 얻으면서 대중이 소극적인 구경꾼으로 전락했다면, 이제 다시 ‘추는 춤’을 주목하게 된 것이다. 장 평론가는 “이 흐름엔 현대무용의 커뮤니티 댄스도 크게 작용했다”면서 “60년 전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부터 일반인을 작품에 참여시키면서 만들어진 ‘해프닝’‘퍼포먼스’ 같은 개념이 지금 본격적으로 대중화되고 있다. 늘 마이너였던 춤이 드디어 메이저가 되는 순간인 만큼, 기초예술과 실용무용이 융합해서 발전적인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무용협회 조남규 이사장도 “실용무용 열풍도 환영하지만 모래 위에 집을 지을 수는 없다. 이런 관심을 소외되고 있는 기초예술 발전으로 이어갈 만한 정책적 배려도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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