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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나누지 못한 도시락과 양극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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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김병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부산 변두리의 한 초등학교를 다닌 필자에게 가슴 아픈 기억이 있다. 당시엔 한국전쟁 여파로 고아가 많았다. 필자의 학교에도 인근 고아원생이 한 학급에 서너 명 있었다. 가난하던 시절이었지만 대부분 학생의 책가방엔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이 들어있었다. 양은도시락에 반찬이라곤 김치나 멸치볶음 정도. 난로도 없던 교실에서 겨울에는 차가워진 밥을 덜덜 떨며 먹었지만 그래도 맛있었다. 그러나 기다리던 점심시간이 되면 고아원 학생들은 슬그머니 교실을 빠져나갔다. 검정고무신을 신고 보자기에 교과서를 싸서 허리춤에 매고 학교에 오던 이들에겐 도시락이 없었다. 점심을 먹고 운동장에 나오면 추운 겨울 양지 바른 곳에 모여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때는 몰랐다. 가난한 나라의 고아원엔 도시락까지 싸 줄 돈이 없음을, 친구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점심 종이 치자마자 밖으로 나갔던 이들의 마음을, 그리고 꾸벅꾸벅 조는 것은 허기가 져서임을. 우리는 무지했다. 다 가난해서인지 더 가난한 자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 후 이 상황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아팠다. 왜 초등학교 선생님은 친구를 위해 도시락을 하나 더 싸 오자고 제안하지 않으셨을까. 다 어려운 형편임을 아는지라 말을 꺼내기 어려우셨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결정은 옳지 않았다. 가난으로 인간다움을 빼앗긴 이웃이 있다는 것은 어린이도 알아야 할 불편한 진실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배려하는 것은 공동체의 핵심 가치라고 가르쳐야 했었다.

한국의 소득불평등은 높은 수준
분배정책 효과 OECD 최하위권
양극화가 경제·정치 파괴하는데
양당 후보의 정책은 안일해 보여

불편한 진실은 또 있다. 최빈국에서 반세기 만에 선진국이 된 한국의 불평등은 심각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지니계수는 OECD 38개 회원국 중 11번째로 높다. 중남미와 동유럽 국가를 제외하면 다섯 번째다. 한국이 상대적으로 평등한 국가로 아는 사람도 있다. 이는 예전에 가계동향조사를 이용하여 측정한, 잘못된 지니계수 때문이다. 이 조사는 응답자가 월 소득을 스스로 기입하는 방식이어서 고소득자는 참여하지 않거나 참여해도 소득을 낮게 보고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정부는 2017년부터 국세청 납세 자료 등으로 보완한 가계금융복지조사를 활용하고 있다. 그랬더니 지니계수가 크게 높아졌다. 이전 조사를 이용하면 한국의 지니계수는 OECD 국가 가운데 중간 이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조사에 의하면 한국은 소득불평등도가 높은 위험한 국가다.

가난이 사람의 역량을 발휘하지 못하게 막듯이 양극화는 사회의 잠재력을 허비한다. 양질의 교육에서 배제되는 우수한 아이는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의 손실이다. 기업가 자질이 뛰어난 자도 자본이 없으면 기업을 시작할 수 없다. 양극화로 인한 사회 갈등과 정치 불안정은 중대한 문제다. 경제적 양극화는 미국의 2008년 금융위기와 최근 정치 갈등의 근인(根因)이다. 사람의 발목에 채우는 착고(着庫)같이 양극화는 사회의 발을 묶어 앞으로 나아갈 수 없게 만든다. 필자가 연구한 바로는 자본주의로의 체제이행기에 러시아가 양극화 때문에 잃어버린 성장률은 연 2.1%p였다. 불평등과 실업이 급증하면서 사회가 양극화되자 경제개혁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룰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진보와 보수는 상대방 때문이라며 공격하지만 실상 문제의 뿌리는 양극화에 있다. 그러나 한국의 분배 정책은 낙제 수준이다. 분배 정책의 핵심은 취약계층에 재원을 집중하고 갑자기 생계가 어려워진 사람을 돕되 가능한 한 근로 및 저축 동기가 약화하지 않도록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금을 내기 전과 정부의 재정정책이 개입된 후 지니계수가 개선된 정도를 보면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꼴찌에 가깝다. 다른 국가 대부분의 개선율이 30%를 넘는 반면 한국은 2016년과 2019년 각각 12%, 16%에 불과했다. 한국의 사회보장지출이 OECD 평균보다 낮다는 사실을 감안해도 그렇다. 정부가 말로써는 양극화 해소를 내세웠지만 기실 정책은 표와 정권의 이익을 따라 집행했다는 의미다. 지역구를 위한 쪽지예산, 토목공사에 의한 경기 부양이나 소득주도성장 정책에 따른 일자리안정자금이 대표적이다.

차기 대선 후보들의 정책은 어떤가. 이재명 후보가 내놓은 기본소득은 양극화 해소라는 과녁을 맞힐 수 없다. 대부분의 엄밀한 연구는 기본소득이 소득불평등 완화에 도움 되지 않는다고 밝힌다. 반면 도움 된다는 주장의 근거는 궁색하다. 윤석열 후보의 양극화 해소 방안도 궁금하다. 대선 후보로 선출된 직후 그는 취약계층에 대한 복지 강화를 강조했다. 그러나 ‘어떻게’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다음 대통령은 양극화 해소를 정책의 우선순위로 삼아야 한다. 임기 동안 현재 지니계수인 0.34를 OECD 회원국 중간 수준인 0.30∼0.32로 낮추겠다는 목표를 잡고 구체적인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극심한 가난은 인간다움을 앗아간다. 양극화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동반성장에 가장 큰 적이다. 약자를 공감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나침반 없이 위기의 바다를 항해하는 선장과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