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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키호택과 걷는 산티아고길 80일] “어이, 카메라 내놔” 험악한 10명이 길을 막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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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키호택과 걷는 산티아고길 80일] 12화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호택아. 저 앞에 쌓여 있는 건 뭘까. 궁금한데 가보자.

호택아. 저 앞에 쌓여 있는 건 뭘까. 궁금한데 가보자.

나바레떼를 떠났다. 발톱을 너무 깊이 깎고 걷다가 염증이 생기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이틀을 쉬었다. 일정이 늘어졌지만, 호택이도 동훈이도 덕분에 푹 쉬었다. 발가락은 생각보다 빨리 회복됐다. 붕대를 감았지만 걷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18km를 걸어 나헤라에 도착했다.

우와아. 이거 다 건초야. 호택이 너 일년 식량은 되겠다.

우와아. 이거 다 건초야. 호택이 너 일년 식량은 되겠다.

발톱을 깊이 깎아 염증이 생겼다. 덕분에 이틀을 쉬었다.

발톱을 깊이 깎아 염증이 생겼다. 덕분에 이틀을 쉬었다.

다시 걷다가 소독을 하려고 양말을 벗었더니...

다시 걷다가 소독을 하려고 양말을 벗었더니...

파리 한마리가 달라붙어 쫒아도 가지 않는다. 한국 아재 발냄새가 그리 좋으니.

파리 한마리가 달라붙어 쫒아도 가지 않는다. 한국 아재 발냄새가 그리 좋으니.

동훈이 양말은 구멍 숭숭. 운동화는 너덜너덜.

동훈이 양말은 구멍 숭숭. 운동화는 너덜너덜.

나바레떼는 도자기로 유명해서인지 오크통보다 초벌구이 그릇이 많이 보인다. 나헤라까지 이어지는 리호아 넓은 벌판은 온통 포도밭이다. 수확을 마친 포도밭에는 미처 따지 못한 열매가 많았다. 기계로 수확하니 꼼꼼히 따내지 못하는 모양이다. 남은 열매는 나그네와 빈자의 몫이다. 작은 포도 알갱이들을 입안에 털어 넣으니 황홀한 단맛이 퍼진다.

걷다가 만난 길가 트럭 짐칸에서 붉은 포도즙이 흘러내렸다. 그 아래는 양동이가 놓여 있었다. 손으로 받아 마셔보니 꿀맛이 따로 없다. 주인이 수확한 포도를 트랙터 가득 싣고 다가왔다. 포도를 두 손으로 잔뜩 가져와 호택이를 주었다. 당나귀가 먹어도 된다고 했다. 그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우리의 여정을 응원했다. 호택이 덕에 우리도 포도로 배를 채웠다. 남은 열매가 호택이 등에서 춤을 추었다.
“저거 산티아고까지 가면 건포도 되겠다. 킥킥”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그래도 밥은 먹어야지.

빨래를 해서 호택이 등 위에 얹어놓고 다니면 자연 건조. 팬티 임자는 아부지? 동훈이? 호택이 거는 아니겠지.

빨래를 해서 호택이 등 위에 얹어놓고 다니면 자연 건조. 팬티 임자는 아부지? 동훈이? 호택이 거는 아니겠지.

포도 농사를 많은 짓는 고장이라 그런지 아프리카 사람으로 보이는 노동자들이 많았다. 무심코 영상을 찍으며 가는데 그중 한 명이 소리 지르며 삿대질을 했다. 일부러 자신들을 찍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10여명이 우르르 몰려왔다. 놀란 호택이가 껑충 뛰더니 그들 속으로 돌진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용맹했던지 여포의 적토마가 달려나가는 줄 알았다. 호택이를 보고 사기가 꺾였는지 그들은 빼앗아간 카메라도 돌려주었다.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자신들의 초라한 모습이 누군가의 사진으로 남는다는 것이 싫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진정으로 미안함을 표시하고 서둘러 길을 떠났다.

앞서간 순례자가 왼쪽길로 가라고 자갈로 화살표를 만들어놓았다.

앞서간 순례자가 왼쪽길로 가라고 자갈로 화살표를 만들어놓았다.

방향타가 없었으면 오른쪽 길로 갈 뻔했다.

방향타가 없었으면 오른쪽 길로 갈 뻔했다.

우리는 이른 저녁 나헤라에 도착했다. 순례길에서 만나는 도시나 마을에는 멀리서 교회 종탑이 보인다. 순례자에게 종탑은 거친 파도에 지친 어부가 항구로 돌아올 때 만나는 등대와 같다. 피곤한 몸 위로 위로가 찾아왔다.
도시는 작았지만 도도한 역사의 흔적이 곳곳에서 배어났다. 나헤라강이 시내를 가로지르며 흘렀다. 고 잘 가꾸어진 강변 잔디밭이 인상적이었다.

호택아 다 왔어. 이 강 건너 가면 나헤라 읍내야.

호택아 다 왔어. 이 강 건너 가면 나헤라 읍내야.

“오늘 여기서 자고 갈까?”
“마침 공립 알베르게가 있는데 숙박비가 6유로밖에 안 되네요. 그리로 가죠.”
6유로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게다가 거기에는 유명한 산타 마리아 라 레알(Santa Maria La Real)수도원이 있고, 당나귀가 쉬기 좋은 강가 풀밭이 있었다. 알베르게에 가니 먼저 온 순례자들이 하루 묵언 수행을 끝내느라 왁자지껄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우리가 등장하니 모두 동키호택에게 몰려들었다.
당나귀라는 말에 알베르게 자원봉사자들까지 달려 나왔다. 60대 아주머니와 30대 젊은 여자였는데 호택이를 보고 입이 쩍 벌어졌다.
“와! 정말 예쁘네요. 여기서 주무실 건가요?”
“아니요? 우리는 당나귀와 함께 자야 하거든요.”
원래는 알베르게에서 자고 싶었는데 갑자기 마음이 변했다. 동훈이 눈빛에 실망이 스쳐 갔다.

은하수 구경하며 잔디밭에서 노숙 준비.

은하수 구경하며 잔디밭에서 노숙 준비.

호택이는 밤에도 식사 중.

호택이는 밤에도 식사 중.

“동훈아 너는 알베르게에서 자. 하늘을 보니까 오늘 별이 너무 멋질 것 같아. 밤 기온도 높으니까 난 당나귀하고 같이 잘게. 진심이야.”
열아홉 살 동훈이에게 마흔 살이나 더 먹은 내말은 핵폭탄이다. 어찌 편한 잠을 자리오.
“아녜요. 저도 그냥 밖에서 잘게요.”
이때 나이 많은 알베르게 봉사자가 다가왔다.
“필요하시다면 샤워실을 이용하셔도 돼요. 그리고 식탁을 사용하셔도 됩니다. 세탁실도 가능하니까 쓰세요.”

우리가 특별대우를 받는 이유는 오직 호택이 덕분이다. 일기예보를 보니 최저기온 12도에 비가 올 확률은 0%, 밤낮의 기온 차도 크지 않으니 이슬도 없어 보였다. 텐트를 치지 않아도 잘 수 있는 최적의 조건이었다. 하늘의 별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비박을 계획하며 이렇게 마음이 설레다니.

짧게 깎아 놓은 잔디는 푹신한 침대와 같았다. 별이 하나둘씩 동쪽 하늘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과거 수도사들이 머물며 기도하던 절벽의 굴에 불이 하나씩 켜지는 것을 보며 누웠다. 깜빡 잠이 들었다가 눈을 떴다.
“와아!”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졌다. 하늘에 펼쳐진 저 장관, 셀 수 없는 별 무리가 서쪽 하늘을 향해 흘렀다. 은하수, 그야말로 별이 흐르는 강이다. 눈을 가늘게 뜨니 하늘이 별 바다처럼 보였다. 견우는 백조를 타고 이미 서쪽으로 기울고, 북두칠성 꼬리는 남쪽 하늘에 걸렸다. 천 년 전 순례자들도 보았을 그 별들이 내 앞에 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바로 내 눈앞에 펼쳐져 있다.
‘밖에서 자기를 잘했어. 게다가 텐트를 치지 않은 것은 신의 한 수야.’
기막힌 선택을 한 나 자신을 칭찬하며 깊은 잠이 빠져들었다.
“아부지, 빨리 일어나요. 빨리욧.“
잠결에 동훈이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호택이가 물에 빠졌나 했다. 누에고치 침낭의 지퍼를 열자 하늘에서 물이 쏟아졌다.
”피식 피쉭 치익 치익…“
새벽 2시에 잔디에 물을 주는 스프링클러가 물을 뿜어대기 시작했다. 침낭은 물론 컴퓨터와 벗어놓은 옷까지 몽땅 젖었다. 우리는 비 맞은 생쥐처럼 근처 아파트 담장에서 아침을 맞았다. 이 작은 도시에 스프링클러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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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다가 스프링클러 물세례를 맞고 긴급 피난. 몽땅 젖었다.

잠자다가 스프링클러 물세례를 맞고 긴급 피난. 몽땅 젖었다.

알베르게는 4시간 뒤에 문 여는데... 담벼락에 기대 비닐 뒤집어 쓰고 오돌오돌.

알베르게는 4시간 뒤에 문 여는데... 담벼락에 기대 비닐 뒤집어 쓰고 오돌오돌.

 이 집 처마 밑으로 긴급 피난 가 밤을 샜다.

이 집 처마 밑으로 긴급 피난 가 밤을 샜다.

아침이 되자 불쌍하다고 밥도 주고 샤워도 하라 하고.

아침이 되자 불쌍하다고 밥도 주고 샤워도 하라 하고.

하늘이 두쪽나도 중앙일보 기사 마감은 해야 해.

하늘이 두쪽나도 중앙일보 기사 마감은 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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