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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 아동 법정진술 거부…성추행 피고인 무죄 판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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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어린이 성폭력 피해자의 비디오 녹화 증언과 진술조서가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되지 않아 성폭행 혐의 피고인이 무죄로 풀려났다.

부모가 아이의 정신적 충격을 우려해 아이가 직접 법정 진술을 거부한 사건이어서 어떤 판결이 날 것인지 관심을 끌어온 사건이었다.

서울지법 서부지원 안승국 형사1단독 판사는 30일 미성년자 의제 강제추행 혐의로 기소돼 징역 3년이 구형된 유치원 운영자 洪모(59)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해자 측은 법정 진술을 거부하고 검찰 및 경찰 진술조서를 형사소송법 제314조의 예외조항으로 인정해 주도록 요구하고 있으나 이 사건의 경우 예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며 "형사소송법상 범죄 증명이 없는 경우여서 무죄를 선고한다"고 밝혔다.

형사소송법 제314조는 피고인이 동의하지 않는 진술조서의 증거 능력을 인정하지 않으며, 법정 진술을 해야 할 당사자가 '사망, 질병, 외국거주 및 기타 사유'로 출두할 수 없을 때에만 예외적으로 진술조서를 증거로 인정하고 있다.

재판부는 "피해자 李모양이 너무 오래돼 기억할 수 없다는 것도 어머니의 진술 외에 객관적으로 인정할 증거가 없어 예외 사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또 "법정 증언이 李양에게 정신장애를 초래할 위험이 있다는 의사의 진단서도 제314조가 규정한 질병으로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사건의 발단은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李양(당시 5세)의 어머니 宋모(44)씨는 李양이 다니던 유치원 원장 洪씨를 성추행 혐의로 고소했다.

그러나 검찰은 '피해자가 추행 일시.장소.횟수 등을 기억하지 못한다'며 불기소 처분했다.

宋씨는 검사를 상대로 헌법소원을 제기, 지난해 8월 불기소 처분 취소 결정을 받아냈다. 재수사가 이뤄지면서 洪씨가 기소됐고, 지난 1월부터 재판이 진행돼 왔다.

하지만 宋씨는 딸을 증인석으로 데려오기를 거부했다. 5년 전 일을 기억하기도 어렵고, 설사 기억해 낸다 하더라도 그때의 충격을 되살리는 것은 재차 성폭력을 가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결국 법정에는 李양이 경찰.검찰에서 한 진술서와 병원 치료과정에서 녹화한 비디오 테이프만 제출됐다.

일부 아동단체들은 이번 판결이 성폭력 피해 아이의 인권보호를 위해 지난 7월부터 실시하고 있는 '13세 미만 성폭력 피해 아동 진술녹화제'에도 영향을 미칠까 우려했다.

고란.임미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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