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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아는 게 겁난다" 총수들 선거철 '해외도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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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선거철만 되면 손 벌리는 사람이 많아 죽을 지경입니다. 차라리 정치헌금을 중앙선관위로 단일화하면 안될까요." A그룹 고위 임원은 "정치자금 비리가 터질 때마다 결국 멍드는 곳은 기업뿐"이라고 하소연했다.

대선자금 수사가 확산되면서 기업들이 전전긍긍하고 있다. 재계는 정치권과의 '검은 돈'거래를 근절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선거 비용을 줄이고, 정치헌금 방식도 투명하게 바꿔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친소관계 따른 '업무분담'=재계에 따르면 정치권에서 대기업에 정치자금을 요구하는 루트는 통상 그룹본부(구조조정본부 등)와 각 계열사로 나뉜다. 거물급 정치인은 그룹 차원에서, 나머지는 계열사별로 분담케 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은밀히 이뤄지는 헌금일수록 철저히 친소관계에 따른다. C그룹 모 임원은 "정당 중진들은 저마다 친한 대기업 임원 명단을 확보하고 있다. 특히 학연.지연을 따진다"고 말했다.

일부 정치인은 총수와 직접 상대한다. D그룹 계열사 사장은 "오너에게는 친분이 있다고 생각하는 국회의원이 거의 다 찾아온다"고 말했다.

그가 전한 일화 하나. "한번은 회장이 '국회의원을 아는 게 무섭다'고 합디다. 지난 대선 때에도 한두번 얼굴만 알았던 사람까지 찾아오는 바람에 혼나기도 했어요. 이 때문에 오너들은 선거를 앞두고 해외로 '도피'하는 게 상책입니다."

전문 거간꾼도 등장한다. E그룹 관계자는 "의원이나 보좌관이 직접 찾아와 돈을 받아 가는 경우는 드물고, 양쪽을 잘 아는 브로커가 주로 낀다"고 밝혔다.

◇중견.중소기업도 타깃=정치자금 부담은 대기업만 지는 게 아니다. 한 중견기업 회장은 "정치권이 먼저 손을 내밀며 은근히 반대급부를 제시한다"면서 "갑자기 부상하는 기업을 보면 뒷배경을 의심하는 버릇이 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장을 지낸 모 인사는 회장 재임 때 분통을 터뜨리기도 했다.

기협중앙회에 대한 국정감사장에서 의원들의 가시돋친 발언에 기분이 상했던 그는 의원들과 저녁식사하러 가는 길에 이렇게 말했다. "내 돈 안 받은 ×있으면 나와 봐. 배 터지게 먹고 이제와서 딴 소리냐. "

선거철이 되면 적지않은 중소기업인들도 돈을 준비한다. 개인적으로 내기가 곤란하면 지역.업종이 같은 기업인끼리 돈을 모으기도 한다.

수도권에서 제조업체를 운영하는 한 중소기업인은 "지역구 의원이 공장을 방문해 격려하고 싶다는 연락이 오면 성의(?)를 준비해야 한다"며 "아무런 잘못이 없는데도 정치인이 내미는 손에는 어쩔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주는 쪽도 문제=재계는 정치자금을 일종의 '보험료'이자 '생존 비용'이라고 주장한다. 정치권에서 은밀하게 자꾸 손을 벌리지만 '뒷감당'이 두려워 거절을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1970~80년대까지는 최고권력자나 측근들에게 정치자금을 주면 됐지만 90년대 이후엔 손을 벌리는 정치인이 급격히 늘어나 음성적으론 오히려 부담이 더 커졌다는 주장이다.

전경련 이규황 전무는 "정경유착의 패러다임이 과거와는 달라졌다"고 말했다. 정부가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시절, 정치자금은 기업이 이익을 추구하려는 목적에서 제공된 면이 있었지만 외환위기 이후 시장이 본격 개방되면서부터 대가를 바라고 자금을 제공하는 형태는 줄었다는 것이다. 물론 일부 기업은 자발적으로 돈을 주기도 한다.

한 재계 관계자는 "격동기를 살아온 기업인들로선 실력자들에게 밉보이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고 토로했다.

불법 정치자금을 없애려면 무엇보다 '돈 안드는 선거'가 필수 전제조건이다. 또 음성적인 거래 관행을 없애도록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이와 관련, 전경련은 개별 기업이 직접 정치권에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것을 금지하고 경제단체 등에 기탁하게 한 뒤 정당별로 배분하는 방안 등을 정부에 제안할 예정이다.

K그룹 관계자는 "차제에 정치자금 한도를 늘려 양성화하되 인터넷에 제공 내역을 모두 공개토록 하자"고 제안했다.

이화여대 김수진(정치외교학)교수는 "정경유착은 정치권과 재벌 모두를 멍들게 한다"며 "지금이 이를 근절할 좋은 기회"라고 말했다.

정선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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