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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선언, 공짜가 어딨냐는 美···"언제든 취소" 쉽게 보는 韓 [view]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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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노규덕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성 김 미 국무부 대북 특별대표는 지난 24일 오전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한미 북핵 수석대표 협의를 개최했다. [뉴스1]

노규덕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과 성 김 미 국무부 대북 특별대표는 지난 24일 오전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한미 북핵 수석대표 협의를 개최했다. [뉴스1]

“한국의 종전선언 제안을 포함해 다양한 아이디어와 구상들을 검토하기 위해 협력하기를 기대한다.”

24일 서울에서 열린 한ㆍ미 북핵 수석대표 협의 뒤 성 김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가 한 발언이다. 외교적 수사를 걷어내고 보면 북한을 상대하기 위해 종전선언에만 무게를 두는 게 아니라 다른 구상들도 생각해봐야 한다는 뜻이고, 한국의 종전선언 제안 자체를 수용하겠다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내용도 빠져 있다. 문재인 정부가 임기 말 총력을 기울이는 종전선언에 대한 미국의 입장은 사실상 아직 없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종전선언 둘러싼 한·미 온도 차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9월 미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종전선언은 정치적 선언일 뿐"이라며 언제든 취소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겼다. 하지만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종전선언의 구속력과 법적 효력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청와대 제공]

문재인 대통령은 2018년 9월 미 폭스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종전선언은 정치적 선언일 뿐"이라며 언제든 취소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겼다. 하지만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종전선언의 구속력과 법적 효력을 무겁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청와대 제공]

이는 근본적으로 한ㆍ미가 종전선언의 ‘무게’를 다르게 재고 있는 데서 비롯되는 현상이다. “종전선언은 정치적 선언일 뿐 언제든 취소할 수 있다(문재인 대통령, 2018년 9월 미 폭스뉴스 인터뷰)”는 한국 정부의 입장과 달리 조 바이든 미 행정부는 종전선언의 실질적 파급력과 법적 효력을 한층 무겁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고위 외교 소식통은 “미국은 종전선언 필요성에 대해 ‘충분히 이해한다’는 기본 입장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종전선언이 향후 북ㆍ미 협상이나 대북 제재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우려하는 것 역시 사실”이라며 “북한을 대화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한 수단으로만 활용하기엔 종전선언의 구속력이 상당하고 의도치 않은 부작용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는 시각이 있다”고 말했다. 미국은 정부의 이른바 ‘종전선언 입구론’에 대해 착안점은 공감하면서도 우려를 완전히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북한이 그간 미국을 향해 적대시 정책 철회를 요구해온 점을 들어 종전선언이 이런 불신을 해소하고 대화를 재개하는 ‘마중물’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미국을 집중적으로 설득하고 있다. 또 법적ㆍ규범적 구속력이 없으니 미국이 큰 부담을 느낄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대화 재개 모멘텀" vs "공짜는 없다" 

노규덕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25일 'NK포럼'에 참석해 종전선언 입구론을 재차 강조했다. [연합뉴스]

노규덕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25일 'NK포럼'에 참석해 종전선언 입구론을 재차 강조했다. [연합뉴스]

노규덕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25일 국가안보전략연구원 ‘NK포럼’ 기조발표를 통해 “종전선언은 대북 적대시 정책이 없음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조치라고 할 수 있으며 북측과 대화 재개의 중요한 모멘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는 입장을 다시 강조했다.

하지만 워싱턴 조야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워싱턴의 대표적 외교 정보지 ‘넬슨 리포트’는 지난 22일(현지시간) 발행한 리포트에서 종전선언에 대한 미 외교ㆍ안보 전문가 여럿의 의견을 전했다.

“종전선언은 공짜가 아니다. 미국의 확장억제 및 비확산 노력이 저해될 수 있으며, 북한이나 중국 등 연합훈련이나 (한ㆍ미 동맹의)철저한 준비태세에 반대하는 쪽에 빌미를 주거나 기대감을 심어줄 수 있다” “종전선언이 발효하면 북한은 가장 먼저 주한 미군과 한ㆍ미동맹이 끝났다며 대대적으로 선전할 것이다. 결국 전쟁이 ‘종료’된다면, 미군이나 동맹이 왜 필요하겠는가. 북한은 이를 신나게 즐길 것이다” 등의 내용이었다.

북한이 종전선언을 선전선동에 악용할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셈이다. 이는 정부의 주장과 달리 일단 미국이 북한과 동등한 국가 대 국가로 종전선언을 할 경우 사실상 협정 등과 다름없는 파급력을 지닐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다.  

'리스크' 우려에 돌다리만 두드리는 美 

미국 측은 종전선언이 사실상 조약에 준하는 법적 효력을 갖는 상황을 대비해 선언문에 들어가는 문구와 문맥, 내용 등에 대한 치밀한 법률적 검토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24일 한미 북핵수석대표 협의를 위해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 들어선 성 김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 [연합뉴스]

미국 측은 종전선언이 사실상 조약에 준하는 법적 효력을 갖는 상황을 대비해 선언문에 들어가는 문구와 문맥, 내용 등에 대한 치밀한 법률적 검토를 진행하고 있다. 사진은 지난 24일 한미 북핵수석대표 협의를 위해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호텔에 들어선 성 김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 [연합뉴스]

이와 관련, 현재 미 국무부의 변호사들이 종전선언의 전반적 내용에 대해 법률적 검토를 하는 단계라고 한다. 선언문에 담기는 구체적 표현과 문맥 등이 어떻게 해석될지, 또 그런 해석이 어떤 주장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등에 대해 세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게 국무부의 입장이란 것이다.

국무부가 종전선언 문안의 해석이 어떤 주장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검토 중이라는 점은 북한이 종전선언을 자의적으로 해석해 이를 주한미군이나 유엔사의 지위 변경 요구 등과 연결시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으로 보인다.

특히 미국 내에는 최근 북한이 연이은 미사일 발사와 제재 회피 등으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를 대놓고 위반하는데, 종전선언이라는 ‘선물’을 줘선 안 된다는 시각도 있다. 그렇지 않아도 북한을 향해 쓸 수 있는 카드가 제한적인 상황에서 전쟁 종료에 합의한 뒤 북한이 핵ㆍ미사일 개발을 가속화한다면 북한 비핵화라는 목표는 더 멀어질 수 있어서다.

넬슨 리포트도 “유엔 안보리 결의를 계속해서 무시하는 김정은에 대해 종전선언에 집중하며 손을 내미는 것으로 보상할 필요가 없다” “종전선언은 '상습적 규범 위반자들(serial cheaters)이 규범을 계속 위반하면 더 나은 거래를 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등의 전문가들 견해를 전했다.

대선개입 우려 키운 "정치적 선언일 뿐" 주장

한국 정부는 종전선언이 정치적으로 상징성을 갖는 선언일 뿐 유엔사령부 및 주한미군 문제와 연계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유엔사의 경우 정전 체제 유지를 그 존재 이유로 하는 만큼, 정전 체제가 종전 체제로 전환됐을 경우 자연스럽게 임무 수행이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한다. 사지는 2018년 2월 한국을 방문한 김여정 당시 당 중앙위 제1부부장과 함께 북한 삼지연 관현악단 공연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의 모습. [연합뉴스]

한국 정부는 종전선언이 정치적으로 상징성을 갖는 선언일 뿐 유엔사령부 및 주한미군 문제와 연계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유엔사의 경우 정전 체제 유지를 그 존재 이유로 하는 만큼, 정전 체제가 종전 체제로 전환됐을 경우 자연스럽게 임무 수행이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한다. 사지는 2018년 2월 한국을 방문한 김여정 당시 당 중앙위 제1부부장과 함께 북한 삼지연 관현악단 공연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의 모습. [연합뉴스]

이같은 미국의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종전선언이 유엔사가 관리하는 정전협정 체제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내용을 명시적으로 포함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조차도 해석의 영역은 여전히 존재하는 데다, 이런 내용은 북한이 수용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아직은 가정적 상황이지만 미국이 받아들일 수 있는 문안은 북한이 거부하고, 북한이 받아들일 수 있는 문안은 미국이 거부하는 근본적 딜레마가 존재한다는 지적이다.

우정엽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종전선언은 전쟁 종료를 선포한다는 의미인 동시에, 전쟁 후 영토 획정과 배상 문제 등 전후 질서를 법적으로 정리하기 위한 전제 조건에 해당한다”“종전선언은 유엔사 및 주한미군 주둔 문제 등으로 연결되는 법적 효과를 완전히 분리하긴 어렵고, 만일 이같은 법적 효과가 없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규정하는 종전선언이라면 '전쟁 종료'의 실질적 효과를 거두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에 더해 종전선언이 이미 한국 국내적으로 여야가 대립하는 정치적 이슈가 됐다는 점 역시 주요 변수가 될 전망이다. 특히 바이든 행정부로서는 종전선언 논의가 자칫 내년 3월 한국 대선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을 경계할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 한ㆍ미 종전선언 논의에 정통한 소식통은 “미국은 종전선언을 지지할 경우 자칫 여권에 대한 지지로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을 잘 알기 때문에 굉장히 예민하고 철두철미하게 접근하고 있다”며 “바이든 행정부 입장에선 중요한 동맹인 한국의 협의 요청을 차마 거절하진 못하고 있지만, ‘대선 개입’으로 비칠 위험성을 감수하면서까지 적극적으로 논의에 뛰어들 생각은 없어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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