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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큰아이가 취직했어요”…노후 리스크 하나 삭제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103) 

전성기가 지나가는 건 두 가지 현상으로 증명되는 듯 싶다. ‘아이가 배로 기기 시작했어요‘, ‘과장 진급했어요’, ‘올해는 성과급이 없대’처럼 주변에 전할만한 일이 점점 뜸해지고, 가끔 뉴스가 생겨도 내가 주체가 아닐 때가 많다. 그런데 오랜만에 그 두 가지를 넘어서는 일이 생겼다.

서울의 큰아이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게임 회사 면접에 최종 합격했단다. 내가 새벽에 일어나면 그때야 방에서 슬그머니 나오며 눈치 보곤 하던 녀석, 게임에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다 싶을 때, ‘그럼 그쪽으로 진로를 정하면 어떻겠냐’고 권해봤는데 허투루 듣지 않았던가 보다. 정부의 청년취업 지원 프로그램을 활용해 그 계통의 학원에 다니며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자기 포트폴리오에 대한 평가가 좋고 순조롭게 되고 있다고 해 내심 기대하면서도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고 무신경한 척했다.

큰아이가 원하던 분야에 취업했다.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다양한 희망과 기대감을 가졌는데, 결국 아빠가 지나온 궤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선택을 했다. 어떤 길을 가든, 관건은 최대의 행복이 아닐까 싶다. [사진 Pixabay]

큰아이가 원하던 분야에 취업했다.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다양한 희망과 기대감을 가졌는데, 결국 아빠가 지나온 궤적과 크게 다르지 않은 선택을 했다. 어떤 길을 가든, 관건은 최대의 행복이 아닐까 싶다. [사진 Pixabay]

자기 목표를 가지고 열심히 매진하는 아이들은 속으로 응원하면서 기다려주는 게 답이지만, 그게 생각보다 어렵다. 당사자보다 더 조바심 나고, “도울 것 없니?” 정도를 넘어 간섭까지 하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다. 한편으로는 빨리 시간이 지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 지긋지긋한 상황이 끝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잦다.

그럴 때마다 뭔가 빠져들 곳을 찾곤 했다. 큰아이 고3 때 나는 퇴근 후 인라인스케이트를 배우고 아내는 그림을 그렸으며, 둘째 고3 때는 같이 열심히 수영하러 다녔더니 시간이 잘 가고 몸과 마음도 가뿐해졌다. 그리고 최근에는 아이의 취업 활동을 지켜보며 평생교육원에서 펜화를 배웠다. ‘안 보이는 게 도와주는 것’이라는 말은 꽤 설득력 있다.

그런 지루한 시간을 보낸 후 합격 소식을 들었고, 비로소 회사에 관한 이야기도 들었다. 그쪽의 문외한이다 보니 게임 회사가 그렇게 번듯한 사옥과 많은 직원을 가졌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연봉이 얼마’라는 말을 들으니 비로소 아이의 취직이 어떤 의미인지 실감 났다. 사실 지금까지는 취업이 너무 힘들다고 하니 어디든 붙기만 바랐지, 그렇게 소속되어 일을 해주면 돈이 생긴다는 당연한 사실은 생각의 저 뒤편 어디쯤 덮여 있었다.

노후 리스크 가운데 자식이 제때 자리 못 잡는 것도 꽤 큰 부분을 차지한다. 부모가 해줄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특히 어딘가에 발목 잡혀 힘들어하는 자식을 보는 건 아주 괴로운 일이다. 요즘 청년들 취업이 좀 어려운가. 그것마저 부모 책임처럼 느껴진다. 그런데 정작 자식은 그런 걸 모르거나 늦게 깨닫는다. 하긴, 일찍 철들어 그런 걸 부모한테 고마워하고 미안해하고 부담 갖는 것보다, 아예 평생 모른 채 잘 되면 그냥 자기가 잘나서 그렇다며 자신만만하고 신나게 사는 것도 좋겠다.

아이의 취업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릴 때의 기억이 생생한데 훌쩍 어른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벌써 이렇게 커 자기 밥벌이를 하게 되었는가 싶다. [사진 박헌정]

아이의 취업에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릴 때의 기억이 생생한데 훌쩍 어른이 된 것 같아 기분이 묘하다. 벌써 이렇게 커 자기 밥벌이를 하게 되었는가 싶다. [사진 박헌정]

그게 부모 마음이다. 어떻든 저만 좋으면 되니까. 아무리 부모와 자식 간이라도 피차 다른 것은 꽤 다를 수밖에 없으니, 너는 너, 나는 나, 각자 알아서 행복해지면 된다. 그래서인지, 나는 아이들이 노동에 대한 의욕과 각오가 단단함을 확인한 이후로는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물론 치열한 경쟁 속에서 큰돈 벌고 출세하겠다고 해도 굳이 말리지는 않겠지만, 아빠로서는 큰돈 아니어도 좋아하는 일 찾아 건강하고 행복하게, 그리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며 살면 좋겠다.

흥분이 가라앉자 하나씩 현실적이고 속물적인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럼 당장 다음 달부터 이 녀석 용돈은 안 줘도 되고, 생활비는 절반만 주고(동생은 아직 못 버니까), 세뱃돈 안 줘도 되고, 그뿐인가, 가끔 사 들고 오는 선물도 이제 자기 돈으로 산 걸 테고, 주택청약도 넣을 테고…. 친구들한테 술 사고, 콘서트도 가고, 택시도 자주 타고 다니겠지? 아빠, 엄마한테 그거 몇 푼 된다고 그렇게 궁상떠냐고 할 날도 얼마 안 남았다. 그럼 이제 그냥 어른이 된 건가? 신도시에 살 때, 밤에 외식하고 돌아오는 길에 아이스크림 하나씩 든 채 두 녀석이 서로 뛰고 업히고 하며 쫑알대고 깔깔대던 기억이 선명한데, 기분 묘하다. 행복하지만 좀 당황스럽다.

한편으로는 앞으로 집에 들어오자마자 피곤해 쓰러져 자는 녀석을 보면 ‘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벌써 돈 벌러 다니나?’ 싶어 애틋해질 것이다. 이제부터는 둘째의 취업문제, 결혼문제, 아이들 집 장만…. 세상 모든 일은 끝은 없고 시작으로만 구성된 것 같다. 하지만 내 몫은 아니니 나서지 말고 또다시 응원하며 기다려야 한다. 때가 되면 또 다른 축복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당분간은 이 한 가지만 기뻐하며 감사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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