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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역사 속으로…다시 책 펴는 만학도의 설렘과 긴장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101)

퇴직 후 지난 몇 년 동안 반퇴 생활을 해오며 나름대로 보람 있고 행복했다. 아내와의 시간, 긴 여행, 책 보고 글 쓰고…. 여유롭고 즐거운 일상이었다. 그런데 마음 한쪽이 빈 듯한 허전함이 있었고, 점으로 시작한 그 느낌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크고 선명한 구(球)가 되어갔다. 지적인 부분은 비워둔 채 감성만 채우며 살자니 정신적인 허기가 찾아온 것이다. 물론 열심히 책 보고 강연도 듣지만, 많이 부족했다.

그래서 지난 6월에 용기를 내 전북대학교 사학과 대학원에 지원했고, 이달 초부터 늦깎이 학생이 되었다. 다시 공부를 시작하기로 하니 여름 내내 뭔가 서서히 조여오는 느낌이었고 개강을 앞두고는 압박감이 극에 달했다. 이유는 딱 하나, 내 머리가 공부를 따라갈 수 있을지 미덥지 못해서였다.

마흔 즈음에 나갔던 야간 고등학교 교생실습. 낮에 일을 마치고 온 만학도 학생들은 공부도 중요하지만 젊은 시절에 못 한 공부를 하고 있다는 만족감과 그들끼리의 소통도 아주 중요했다. 사진은 다른 선생님이 진행하던 컴퓨터 시간이다. [사진 박헌정]

마흔 즈음에 나갔던 야간 고등학교 교생실습. 낮에 일을 마치고 온 만학도 학생들은 공부도 중요하지만 젊은 시절에 못 한 공부를 하고 있다는 만족감과 그들끼리의 소통도 아주 중요했다. 사진은 다른 선생님이 진행하던 컴퓨터 시간이다. [사진 박헌정]

느낌대로 설렁설렁 뭘 읽는 것과 집중해 학습하는 것은 아주 다르다. 한 자리에서 책을 오래 보지도 못하겠고 방금 읽은 것도 잊어버린다. 물론 대학원 공부가 입시공부처럼 달달 외우는 것은 아닐 테지만 이해력도 그렇고, 오랜만에 접하는 영어 독해도 부담스럽다. 회사 다니던 시절에 야간 교육대학원에 다녔었는데, 만만하게 생각했다가 많이 고생했다. 강의 내용을 따라가기 힘들었고, 공부할 시간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몸에 밴 직장인의 근면함으로 코피 쏟아가며 따라갔고, 어쩌다 보니 성적우수장학금까지 탔는데, 그때는 마흔 살이었다. 지금은 돋보기 없으면 아무것도 못 읽는다.

가끔 티브이에서 늦은 나이에 공부하는 어른들의 사연을 보고 있자면 마음이 훈훈하고 애틋해진다. 그런데 물론 그들이나 나나 먹고살려다 보니 뒤늦게 시간이 났지만 역시 공부는 제때 하는 게 좋다. 늦은 공부는 따라가기도 어려울뿐더러, 책이 아니라 세상에서 직접 배운 게 많아 까딱하다간 배가 산으로 갈 수도 있다.

대학원생 신분으로 교생실습을 나갔었는데, 만학도가 아주 많은 야간 고등학교였다. 그때까지 나는 만학은 젊을 때 형편이 어려워 기회를 놓치고 나이 들어 삶이 여유로워졌을 때 공부에 대한 미련과 한 때문에 용기를 내 도전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현실은 약간 달랐다. 가난 때문에 공부할 시기를 놓쳐 한이 맺힌 건 사실인데, 그들은 여전히 가난했다. 건물청소, 건설 노동, 행상 같은 고된 일을 하고 온 50~60대들도 많고, 세상에서 상처받거나 한때의 실수 때문에 다시 시작한 아이들도 많았는데, 경험 많고 희생적인 선생님들 덕분에 언제나 밝고 활기 있었다.

이번 학기부터 대학원 신입생이 되어 다시 공부에 도전한다. 아직 비대면 수업이지만 캠퍼스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는 젊은 학생들을 보고 있자니 만학의 설렘과 긴장감이 동시에 밀려온다. [사진 박헌정]

이번 학기부터 대학원 신입생이 되어 다시 공부에 도전한다. 아직 비대면 수업이지만 캠퍼스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는 젊은 학생들을 보고 있자니 만학의 설렘과 긴장감이 동시에 밀려온다. [사진 박헌정]

학교시설은 열악했고 수업 분위기는 꽤 어수선하고 산만해 내가 계획한 대로 수업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나보다 훨씬 연장자인 ‘어른 학생’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들끼리 하던 이야기는 끝내야 했고, 어떤 분은 갑자기 질문 있다며 손들곤 엉뚱하게 자기 인생 이야기를 5분이고 10분이고 늘어놓는데, 적절히 통제하기도 힘들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말을 끊으면 화를 내니, 연륜이 꽤 있다고 생각했던 ‘마흔 살 교생’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수업시간만 아니라면, 여기가 막걸릿집이라면 정말 계속 들어주고 위로해줄 만한 사연이었다. 물론 “이쪽에서 잘못하셨네”하며 타박해줄 만한 것도 있었다. 그때 나는 그분이 학교에 다니는 것은 지식을 얻으려는 목적도 있지만, 지난 시절에 자기만 못한 공부를 늦게라도 해보며 학창시절 기분을 즐기는 것도 중요함을 눈치챘다.

사실 오랜만에 하는 교과학습이, 그것도 낮에 고된 일을 끝내고 와서 또다시 다섯 시간씩 하는 학습이 그리 만만한 일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지식은 교과서 속에 있지도 않았다. 이미 지나온 힘겹던 인생역정을 교과서의 논리로써 검증할 수 있겠는가. 이 사회가 교과서를 통해 꿈으로 가득 찬 10대들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하고 잘 산다고 하는 세상의 질서를 직접경험으로 가득 찬 그들 머릿속에 욱여넣는 게 가당키나 한가.

지금 생각해보면 그 어둡고 비좁은 교실은 교육보다 소통과 치유의 공간이었다. 이 험한 세상에서 이미 배울 것은 몸으로 다 배웠으니, 힘든 일과를 끝내고 같은 처지 사람을 만나 뭐라도 배우게 되면 배우고 서로 보듬고 웃고 풀어내는 공간이 필요했다. 그런데 ‘현장실습’으로만 받아들인 나는 그들이 원하는 바를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나중에는 정말 수업시간을 어떻게라도 때워야 했기에 교과서는 덮고 육십갑자 짚는 법, 조선 시대 과거제도와 관직(사극 볼 때 도움 되라고) 같은 것을 미리 준비해 알려주었더니 다들 좋아하며 집중했다.

다시 내 이야기로 돌아와, 나는 진작부터 관심 두고 매진했던 서양 문학과 퇴직 후 꾸준히 해온 ‘해외 한 달 살기’를 연계해 볼 생각으로 서양사 공부를 시작하려고 한다. 이런 것 몰라도 세상살이에 아무 지장 없는데,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지금부터 공부해서 대단한 학자가 될 수도 없을 텐데, 그런데 인제 와서 왜 다시 일을 벌여 자신을 못살게 굴고 스트레스받는가 싶다. 즐거운 마음으로 시작하려 하지만, 긴장감은 어쩔 수 없다. 오래전에 만났던 그분들이 설렘과 긴장을 동시에 안고 교실 문에 들어섰던 것처럼 나도 똑같은 기분으로 중세와 근대 역사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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