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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멈춰버린 30년'이 알려준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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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일본 도쿄에서 선착순으로 무료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맞기 위해 젊은이들이 줄을 서고 있다. 일본 정부의 코로나 대응 미숙으로 일본 내 확진자수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 [자료 일본 닛폰뉴스네트워크 뉴스 캡처]

일본 도쿄에서 선착순으로 무료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맞기 위해 젊은이들이 줄을 서고 있다. 일본 정부의 코로나 대응 미숙으로 일본 내 확진자수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고 있다. [자료 일본 닛폰뉴스네트워크 뉴스 캡처]

#1 원칙이 중요하다지만..영문 막도장 파 인감등록

한국·일본·미국 세 나라에서 TV 배송 날짜 변경을 한 적이 있다. 먼저 한국. 전화응대를 한 직원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답변은 깔끔했다. "네, 바로 그렇게 변경해드리죠." 다음은 일본.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계약서에 안 되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죄송, 죄송합니다." 친절하지만 단호했던 건지, 단호하지만 친절했던 것인지 헷갈리지만 어쨌든 '노'. 마지막으로 미국. 미국은 전화 연결 자체가 안 됐다.
18년 전 도쿄특파원부임 때는 일본의 원칙 고수가 장점으로만 보였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다시 일본을 보니 그건 아닌 듯하다. '안 되던 것을 되게 해 보려는' 의지, 변화를 선도해 보려는 활력은 찾아볼 수 없다. 6G, AI 시대에 아직도 팩스 없인 행정사무를 볼 수 없고, 신용카드 하나 만드는 데 기본이 한두 달이다. 'KIM'이란 영문 막도장을 새겨 인감등록을 해야 하는 세계 유일의 나라. 머리가 굳어버리니 새로운 발상이 나올 리 없다. 온갖 기발한 신상품들이 넘쳐나 한 번 구경하러 가면 2, 3시간이 후딱 지나갔던 도쿄의 '도큐핸즈'는  올드패션 전시장이 돼 있었다. TV를 켜도 10, 20년 된 재미도 정보도 없는 프로그램뿐. 포맷을 조금씩 바꾼 '쇼와(昭和·1988년에 끝남)의 명곡 100선'을 반복해 내보내며 "아, 그때가 좋았죠"를 외친다. 변한 게 없다.  '멈춰버린 30년'이다.

아직까지 도장 문화가 사라지지 않고 있는 일본에서는 외국인에 대해서도 이름을 새긴 도장을 인감도장으로 등록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아직까지 도장 문화가 사라지지 않고 있는 일본에서는 외국인에 대해서도 이름을 새긴 도장을 인감도장으로 등록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종이 서류에 일일이 도장을 찍어야 하는 일본 '도장 문화'. [인터넷 캡쳐]

종이 서류에 일일이 도장을 찍어야 하는 일본 '도장 문화'. [인터넷 캡쳐]

#2 옛 세계 최고 백신강국 명성은 어디로

부자 망해도 3대는 간다고, 그나마 튼튼한 기초과학과 성실하고 친절한 국민성으로 버티곤 있다. 그러나 녹아내려가는 아이스크림을 보는 것 같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은 수두·일본뇌염 백신 기술을 미국에 공여하던 최고의 백신 강국이었다. 그래서 코로나가 터졌을 때 일본이 백신을 먼저 내놓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속을 들여다보니 92년 홍역 백신, 96년 혈우병 에이즈 소송에서 국가와 제약사가 패한 뒤 민간은 투자를 사리고 정부는 지원을 끊으며 아예 손 놓고 있었다. 그 결과가 한·일 역전. 코로나 대응 시스템도 마찬가지다. 밀접 접촉자를 찾는 건 아예 포기했다. 행정 능력이 따라가질 못해서다. 그러니 하루 2만명(인구 2.5배를 고려해도 한국의 4~5배) 이상 확진자가 나와도 나라 전체가 그러려니 자포자기한다. 위기대응 능력? '1(일본) 대 390(한국)'으로 끝난 아프간 대피 작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총체적 국력 쇠퇴다.

활기·역동성 '쇼와'에 멈춘 일본 #'고인물 정치' 방치한 언론 책임 커 #기자가 '메신저'로 남아서 되겠나

#3 고인 물 정치, 방치하는 언론...총체적 쇠퇴 

결국은 정치, 언론의 문제로 귀결된다. 지도자를 만들지 않는 교육시스템도 문제지만 정치가 '고인 물'이 됐다. 세습의원 비율은 무려 26%. 집권 자민당만 따지면 40%다. 한국(5%), 영국(3%), 미국(6%)보다 현저히 높다. 일만 잘하면 그럴 수도 있다. 문제는 못해도 바꾸질 않거나 바꾸지 못하는 거다. 스가 정권의 내각지지율은 최근 4년 사이 최저치인 26%로 고꾸라졌지만, 국회의원들은 파벌 수장 입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방치하는 '착한 언론'은 더 문제다. 70년대 록히드 스캔들(당사자인 다나카 총리는 당시 철저하게 부인했다) 이후 일 언론의 권력감시(watchdog)는 급격하게 사그라들었다. 정치가 언론을 더욱 '을'로 길들이고, 당사자가 인정하지 않으면 가급적 보도하지 않는 일 언론 특유의 소극적 자세까지 자리를 잡으면서다. 분명 오보는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정치와 사회의 활력, 역동성도 사라졌다.

[사진 지지통신]

[사진 지지통신]

#4 "한국은 대부분 저널리스트, 일본은 전원 메신저"

한·일 언론에 조예가 깊은 한 원로는 이렇게 지적했다. "한국 기자는 대부분 저널리스트가 됐고, 일본 기자는 모두 메신저(정보전달자)가 됐다." 뼈 있는 말이다. 보도와 주장의 경계선을 혼동하고, 때로는 선을 넘는 한국 기자들이 자성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자가 단순한 메신저로 남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그리고 그걸 정부가 강제하려 하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일본의 '멈춰버린 30년'은 그 답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