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원칙이 중요하다지만..영문 막도장 파 인감등록
」 한국·일본·미국 세 나라에서 TV 배송 날짜 변경을 한 적이 있다. 먼저 한국. 전화응대를 한 직원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다. 하지만 답변은 깔끔했다. "네, 바로 그렇게 변경해드리죠." 다음은 일본.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계약서에 안 되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죄송, 죄송합니다." 친절하지만 단호했던 건지, 단호하지만 친절했던 것인지 헷갈리지만 어쨌든 '노'. 마지막으로 미국. 미국은 전화 연결 자체가 안 됐다.
18년 전 도쿄특파원부임 때는 일본의 원칙 고수가 장점으로만 보였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 다시 일본을 보니 그건 아닌 듯하다. '안 되던 것을 되게 해 보려는' 의지, 변화를 선도해 보려는 활력은 찾아볼 수 없다. 6G, AI 시대에 아직도 팩스 없인 행정사무를 볼 수 없고, 신용카드 하나 만드는 데 기본이 한두 달이다. 'KIM'이란 영문 막도장을 새겨 인감등록을 해야 하는 세계 유일의 나라. 머리가 굳어버리니 새로운 발상이 나올 리 없다. 온갖 기발한 신상품들이 넘쳐나 한 번 구경하러 가면 2, 3시간이 후딱 지나갔던 도쿄의 '도큐핸즈'는 올드패션 전시장이 돼 있었다. TV를 켜도 10, 20년 된 재미도 정보도 없는 프로그램뿐. 포맷을 조금씩 바꾼 '쇼와(昭和·1988년에 끝남)의 명곡 100선'을 반복해 내보내며 "아, 그때가 좋았죠"를 외친다. 변한 게 없다. '멈춰버린 30년'이다.
#2 옛 세계 최고 백신강국 명성은 어디로
」부자 망해도 3대는 간다고, 그나마 튼튼한 기초과학과 성실하고 친절한 국민성으로 버티곤 있다. 그러나 녹아내려가는 아이스크림을 보는 것 같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일본은 수두·일본뇌염 백신 기술을 미국에 공여하던 최고의 백신 강국이었다. 그래서 코로나가 터졌을 때 일본이 백신을 먼저 내놓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속을 들여다보니 92년 홍역 백신, 96년 혈우병 에이즈 소송에서 국가와 제약사가 패한 뒤 민간은 투자를 사리고 정부는 지원을 끊으며 아예 손 놓고 있었다. 그 결과가 한·일 역전. 코로나 대응 시스템도 마찬가지다. 밀접 접촉자를 찾는 건 아예 포기했다. 행정 능력이 따라가질 못해서다. 그러니 하루 2만명(인구 2.5배를 고려해도 한국의 4~5배) 이상 확진자가 나와도 나라 전체가 그러려니 자포자기한다. 위기대응 능력? '1(일본) 대 390(한국)'으로 끝난 아프간 대피 작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총체적 국력 쇠퇴다.
활기·역동성 '쇼와'에 멈춘 일본 #'고인물 정치' 방치한 언론 책임 커 #기자가 '메신저'로 남아서 되겠나
#3 고인 물 정치, 방치하는 언론...총체적 쇠퇴
」 결국은 정치, 언론의 문제로 귀결된다. 지도자를 만들지 않는 교육시스템도 문제지만 정치가 '고인 물'이 됐다. 세습의원 비율은 무려 26%. 집권 자민당만 따지면 40%다. 한국(5%), 영국(3%), 미국(6%)보다 현저히 높다. 일만 잘하면 그럴 수도 있다. 문제는 못해도 바꾸질 않거나 바꾸지 못하는 거다. 스가 정권의 내각지지율은 최근 4년 사이 최저치인 26%로 고꾸라졌지만, 국회의원들은 파벌 수장 입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다.
방치하는 '착한 언론'은 더 문제다. 70년대 록히드 스캔들(당사자인 다나카 총리는 당시 철저하게 부인했다) 이후 일 언론의 권력감시(watchdog)는 급격하게 사그라들었다. 정치가 언론을 더욱 '을'로 길들이고, 당사자가 인정하지 않으면 가급적 보도하지 않는 일 언론 특유의 소극적 자세까지 자리를 잡으면서다. 분명 오보는 많이 사라졌다. 하지만 그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정치와 사회의 활력, 역동성도 사라졌다.
#4 "한국은 대부분 저널리스트, 일본은 전원 메신저"
」한·일 언론에 조예가 깊은 한 원로는 이렇게 지적했다. "한국 기자는 대부분 저널리스트가 됐고, 일본 기자는 모두 메신저(정보전달자)가 됐다." 뼈 있는 말이다. 보도와 주장의 경계선을 혼동하고, 때로는 선을 넘는 한국 기자들이 자성해야 할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기자가 단순한 메신저로 남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 그리고 그걸 정부가 강제하려 하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일본의 '멈춰버린 30년'은 그 답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