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리스 사태’로 촉발된 남양유업 매각이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안개 속으로 접어들고 있다. 현 대주주이자 남양유업 매각 방침을 공개 선언했던 홍원식(71) 회장이 지분을 매각하기로 했던 계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홍 회장 측은 1일 법률대리인인 LKB파트너스를 통해 주식 매매 계약을 맺은 한앤컴퍼니(한앤코)측에 해제를 통보했다고 밝혔다. 홍 회장 측과 사모펀드인 한앤코는 지난 5월 홍 회장과 그 일가의 남양유업 보유 지분 53.08%를 3107억원에 매각하기로 주식매매계약을 체결했다.
홍회장, "사모펀드가 새 주인처럼 행세"
홍 회장 측은 이날 계약 해제의 이유로 부당한 사전 경영간섭과 비밀유지의무 위반, 신뢰 훼손 책임 등을 꼽았다. 그는 이날 입장문을 통해 “(계약해지 통보와 관련해) 당사자 간 합의가 끝난 이슈임에도 매수인(한앤코) 측이 계약서에 명시되지 않은 것들은 인정할 수 없다면서 돌연 태도를 바꿨다”며 “주주총회를 연기한 것도 매수인이 적법한 절차도 지키지 않은 채 황급히 거래를 종결하려 하였기에 저로선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었다”라고 강조했다. 그는 또 “선친 때부터 57년을 소중히 일궈온 남양유업을 이렇게 쉬이 말을 바꾸는 부도덕한 사모펀드에 넘길 수 없다”고도 했다.
한앤코 "홍 회장이 말 바꾸다 계약 해제"
한앤코는 즉각 반발했다. 한앤코는 이날 홍 회장이 한앤코와의 거래 무산 및 해제를 발표한 데 대해 "계약이 계속 유효하다"며 즉시 반박했다. 한앤코는 또 이날 홍 회장 측이 주장한 사전 합의된 사항에 대한 입장 번복, 비밀유지의무 위반, 불평등한 계약, 남양유업 주인 행세 및 부당한 경영 간섭 주장 등에 대해 “전혀 사실무근”이라며 조목조목 반박했다. 한앤코 측은 "당사가 말을 쉽게 바꿔서 부도덕하므로 임직원, 주주, 대리점, 낙농주, 소비자를 위해서 남양유업을 못 팔겠다"는 홍 회장의 비난에 대해서도 "과연 누가 말을 바꿔왔는지, 지금까지 그 모든 분의 한결같은 목소리가 무엇이었는지 숙고해 보시기 바란다"고 비판했다.
매각가 둘러싼 논란도 계속돼
사실 이번 거래는 처음부터 삐거덕거렸다. 홍 회장 측은 일단 너무 성급한 결정이었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우선 홍 회장 본인이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남양유업을 넘기는 계약을 체결해 놓고 지인들에게 후회스러워하는 모습을 종종 보여왔다고 한다. 또 업계 관계자들은 “홍 회장의 두 아들 조차 한앤코에 지분 매각 사실을 계약 체결 이후 알았을 정도”라고 전했다. 사실 업계 일각에서 남양유업 지분 약 53%를 3107억원에 매각하는 걸 두고 헐값에 넘긴다는 시선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남양유업 매각가를 두고 헐값이라고 볼 수 없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양측은 계약 체결 당시 주가(주당 43만9000원)의 약 1.87배(주당 82만원)를 매각가로 산정했다. 국내 투자은행(IB) 업계에서도 보통 주가의 약 45% 선을 경영권 프리미엄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되레 ”한앤코가 남양유업을 비싸게 샀다“는 시선도 엄연히 존재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홍 회장을 비롯한 남양유업 측이 남양이 주가로만 평가받을 수 없는 ‘알짜기업’이라고 보고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본사인 서울 강남의 1964빌딩을 비롯한 세종공장 등 보유 부동산 가치가 4000억원이 넘는다는 분석도 있다. 남양유업이 한창 잘 나가던 2013년에는 주가가 116만5000원(13년 4월 30일 종가)에 이른 적도 있다.
매각 둘러싼 소송전 장기화할 듯
남양유업 매각을 둘러싼 양측의 시각차가 큰 만큼 대규모 소송전이 불가피할 것이란 전망이 높다. 당장 한앤코는 이미 지난달 23일 홍 회장 측에 주식매매 계약의 이행을 촉구하는 소송을 서울중앙지법에 냈다. 홍 회장 측 역시 "계약을 해제할 수밖에 없게 만든 매수인에게 법적 책임을 엄중히 물어 다시는 이와 같은 피해자가 발생하는 일이 없게끔 하겠다"며 소송전을 피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법원은 일단 한앤코 측 요청을 받아들여 홍 회장 측이 보유한 남양유업 주식의 처분을 금지하는 가처분 결정을 내린 상태다. 남양유업과 한앤코가 이처럼 대규모 소송전을 예고하면서 남양유업 매각작업은 장기전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더구나 홍 회장은 본인이 내걸었던 ‘사퇴 약속’을 어기고 회장직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아들까지 다시 경영에 복귀시켰기 때문이다.
멍들어가는 남양유업…상반기 적자 350억원
그사이 남양유업은 멍들어 가고 있다. 남양유업은 올 상반기 4705억원 매출에, 350억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사업모델이 다소 달라 단순 비교는 어렵지만, 경쟁사인 매일유업은 같은 기간 7563억원 매출에, 429억원의 영업이익을 거뒀다. 이에따라 홍 회장을 비롯한 현 경영진으로는 이번 위기 극복이 쉽지 않을 것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불가리스 사태’ 직후 구성된 남양유업 비상대책위원회도 당시 홍 회장 등에게 소유와 경영 분리를 골자로 한 지배구조 개선을 요구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