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러시아 건축가는 어쩌다 명성황후 시해의 목격자가 됐을까

중앙일보

입력 2021.08.29 13:00

업데이트 2021.08.30 17:18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50)

1895년 무렵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주변 정세는 서양 열강 각국의 이권 다툼으로 복잡한 형국이었다. 1894년 동학운동이 발생하고 조선은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했지만 텐진조약을 이유로 일본도 군대를 파병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청·일 양국의 대치상황 중 1894년 7월 25일 풍도(현 경기도 안산시 단원구) 앞바다에서 일본이 기습공격을 가한 풍도해전(豊島海戰)을 시발점으로 청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중국과 일본 간 전쟁에 한반도가 전쟁터가 되었고 많은 조선인이 피해를 입었다.

흔히 청일전쟁이 일어난 계기로 1894년 1월 발발한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꼽는다.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이 관군을 격파하고 전주성을 점령하자 조선 정부의 청군 파병 요청이 있었고, 청군 파병이 일본군 파병을 유발해 결국 청일전쟁으로 치달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해 가을에 동학농민군이 다시 봉기(2차 농민 전쟁)를 한 것은 경복궁 점령 후 조선 정부를 노골적으로 위협하는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서였다. 전봉준의 공초(범죄 사실 기록)에는 일본이 선전포고 없이 조선 도성에 침입해 왕궁을 격파하고 국왕을 경동케 했기에 시골 선비와 일반 백성이 의병을 규합해 일본과 투쟁했다는 기록이 그 근거이다.

청일전쟁 때 서울 광화문 앞에서 청일 양군의 전투광경을 그린 그림.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청일전쟁 때 서울 광화문 앞에서 청일 양군의 전투광경을 그린 그림. [자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청일전쟁을 이야기할 때 풍도해전 이틀 전 7월 23일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은 청일전쟁에서 중대한 사건이었다. 경복궁 점령 작전은 일본이 조선에서 청일전쟁을 수행할 명분과 전쟁에서 승리할 발판을 얻기 위해 감행된 것이었다. 당일 오전 0시 30분 경복궁 서문 영추문을 통해 침입한 일본군은 궁궐 안팎에서 조선군과 총격전을 벌였다. 일본군은 총검을 들고 함화당 영역에 들이닥쳐 국왕을 경호하는 조선군을 무장 해제시켰다. 그리고 이듬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비극은 이 ‘경복궁점령 사건’으로부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청·일 양군이 주둔한 가운데 양국 간에 전쟁 기운이 높아지자 조선 정부는 다시 양국군의 철수를 요청하였다. 이미 조선에서 정치적 지배력을 구축하고 있던 청국은 이를 받아들였으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조선에 내정개혁을 요구하였다. 명성황후의 민씨 일족이 장악하고 있던 조선 정부가 일본의 요구를 내정간섭이라 하여 거절하자, 일본군은 7월 23일 경복궁에 난입해 무력으로 민씨 일가를 타도하고 흥선 대원군을 섭정으로 다시 추대하는 한편, 개화파 인사로 신내각을 구성하게 하였다. 그러나 대원군 측이 농민군을 이용해 일본군과 친일개화파를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하려 했던 정변 음모는 일본 공사관의 첩보망에 걸려 실패로 돌아갔다. 대원군은 일본 공사관에 소환되었고 일본은 청나라와 손잡고 일본군을 축출하려는 대원군의 의도를 추궁했다. 1894년 10월 중순 이후 일본 측은 흥선대원군과 이준용이 항일활동을 전개한 증거를 가지고 대원군의 공직 사퇴를 종용하였고, 조선 정부는 대원군의 축출에 동의했다. 고종은 김홍집 등 중도 내각을 등용해 갑오개혁(甲午改革)을 시행하고 제국연호를 사용하는 등 본격적인 개화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1895년 청일전쟁에서 청나라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조선 정부는 다시 러시아에 접근하였다.

당시 동아시아의 정세를 살펴보면 청나라는 베트남에서 프랑스에 패하였고, 청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함으로써 노쇠함을 드러냈다. 청일 전쟁을 기점으로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가 일본 중심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국가 최대 역점사업으로 아시아 진출을 위한 시베리아 철도 건설을 진행하고 있었으며 미국과 영국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제의 입장을 지지하며 한반도로부터 한 발 빼는 형국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맺어 조선 침략의 본격적인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어 일본이 요동반도를 장악하자 러시아는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이에 제동을 걸었고 명성황후는 이러한 국제적 흐름을 놓치지 않았고 러시아와 손잡고 일본을 견제하려고 했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청일전쟁 승리 후 조선 강탈을 본격화하기 위해 친러정책 노선의 중심에 있는 왕후를 제거하는 수순에 들어간 것이다.

을미사변 ‘여우사냥’

미우라 고로. [사진 National Diet Library]

미우라 고로. [사진 National Diet Library]

1895년 미우라 고로(三浦梧樓)가 일본 공사로 부임(서울도착. 9월 1일)한 후, 전임 공사 이노우에는 미우라를 배후 조종해 명성황후 시해 사건을 주도하게 하고 9월 21일 일본으로 떠났다. 1894년 일본의 압력을 피해 잠시 창덕궁에 이어했던 고종은 한 달 만에 경복궁으로 돌아오면서 건청궁에 머물렀다. 1년 후 1895년 건청궁 곤녕합(坤寧閤)에서 일인들이 왕후 민씨를 시해하는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났다. 우리 민족으로는 나라의 국모가 왜인들에게 시해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더구나 그 사건은 국권을 상징하는 왕의 궁궐에서 일어났다.

고종과 명성황후는 경복궁 북쪽에 위치한 건청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을미사변 하루 전 친일 세력인 훈련대 해산 명령을 내렸다. 이에 위기의식을 느낀 미우라 공사는 작전명 ‘여우사냥’을 애초의 계획(원래 10월 10일 시해모의)보다 이틀 앞당겨 단행하게 된 것이다. 1895년 10월 8일 새벽 5시경 궁궐의 정문인 광화문에서 최초의 총성이 울렸다. 이를 신호로 일본의 군인, 외교관, 언론인, 거류민 등으로 구성된 암살단을 앞세운 일본 군대가 추성문(秋成門. 북서문)과 춘생문(春生門. 북동문) 두 갈래로 나뉘어 궁궐을 공격했다. 궁궐 전방과 후방에서 예상치 못한 습격으로 궁궐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궁궐 수비대는 제대로 싸우지도 못하고 약 15분 만에 일본군에 의해 장악되었다. 건청궁의 서편에는 고종의 침전인 장안당이 있고 그 동쪽에 황후의 침전인 곤녕합(坤寧閣)이 있었다. 40~50명의 일본인 패거리들이 곤녕합을 에워싸고 황후 수색에 혈안이 되었다.

러시아인 사바틴

조선 근대 서양건축물의 설계자로 우리 근대 건축사에 많은 영향을 준 러시아인 사바틴.

조선 근대 서양건축물의 설계자로 우리 근대 건축사에 많은 영향을 준 러시아인 사바틴.

세레진 사바틴(A. S. Sabatine. 1860~1921)은 1883년 인천해관 직원으로 조선에 입국해 1904년 조선을 떠날 때까지 제물포항의 부두를 축조하고, 조선의 궁궐 건축물과 정동 일대 근대 건축물의 설계와 공사를 맡았던 러시아인이다. 사바틴은 정동의 러시아공사관, 경복궁의 관문각, 덕수궁의 정관헌, 중명전, 돈덕전을 비롯한 조선 근대 서양 건축물의 설계자로 우리 근대 건축사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러시아공사관(사적 제253호)은 1890년 건립 당시 미국·영국·프랑스·독일 공사관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한 건물이다. 20세기 초 유일한 서양식 1급 호텔이던 손탁호텔 역시 그의 손을 거친 것으로 전해진다.

1894년 7월 청일전쟁 직전 ‘일본의 경복궁 침입사건’으로 불안에 시달리던 고종은 9월부터 경복궁 시위대 지휘를 외국인에게 맡겼다. 그 외국인 중 한 명이 사바틴(시위대 부대장)이었다. 사바틴은 을미사변 당시 경복궁 관문각에 상주하던 사바틴은 1895년 건청궁에서 벌어진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목격하고 러시아 영사관을 통해 사건을 국제사회에 알린 인물이다.

사바틴의 증언에 의하면 1894년 8월(조선 음력) 고종은 미국인 고문 그레트 하우스 등의 권고로 제너럴 다이, 닌스테드 대령, 사바틴을 불러 궁궐 안에 거주케 하였다. 고종은 외국인들이 국왕의 주변에 있으면 일본인들이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을 기대했고 그들이 저지르는 만행을 직접 보라는 뜻에서 이루어진 조치였다. 국왕시위대의 임무는 밤낮 4일씩 교대로 궁궐 내의 여섯 개 건물에 차례로 거처하는 것이었다. 을미사변 당시 궁궐 내에는 유럽인 두 명이 거주했고, 그들이 사건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사바틴은 10월 7일 밤부터 8일 새벽까지 야간 근무를 하던 중 명성황후가 기거하던 곤녕합 동행각에서 그날의 사건을 목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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