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고종이 친정 펴려고 사비로 지은 건청궁의 비극

중앙일보

입력 2021.08.15 13:00

업데이트 2021.08.17 08:58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49)

건청궁은 1873년(고종 10년)에 경복궁 북쪽 끝자락에 지은 집으로, 건청궁이라는 이름을 보면 궁궐 안의 궁임을 알 수 있다. [사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건청궁은 1873년(고종 10년)에 경복궁 북쪽 끝자락에 지은 집으로, 건청궁이라는 이름을 보면 궁궐 안의 궁임을 알 수 있다. [사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향원정 북쪽에 있는 건청궁(乾淸宮)은 ‘하늘이 맑다’는 의미의 집이다. 장안당(長安堂), 곤녕합(坤寧閤), 복수당(福綏堂) 등이 건청궁 영역 안에 일곽을 이루고 있다. 건청궁은 1873년(고종 10년)에 경복궁 북쪽 끝자락에 지은 집으로 건청궁이라는 이름으로 볼 때 궁궐 안에 또 하나의 궁이 있는 셈이다. 우리가 광화문에서부터 출발하는 일반적인 관람 루트를 선택해 경복궁을 걷다 보면 건청궁은 맨 마지막 코스에 만날 수 있으니 대부분의 사람은 몹시 힘들고 지친 상황에서 이 집을 보게 된다. 끄트머리에 나타나는 목적지는 대부분 앞에서 천천히 보고 음미하던 것과는 달리 시간에 쫓길 수도 있고 신체적으로도 몹시 힘들어지니 대충 보거나 소홀하게 여겨 지나치게 된다.

특별히 건청궁만 보려고 작정하고 다른 곳을 지나쳐 이곳까지 직행하지 않는 한, 건청궁은 출발지로부터 너무 먼 북쪽에 있다. 따라서 건청궁을 여유 있게 제대로 보려면 신무문으로 들어와서 건청궁과 집옥재, 태원전 영역을 보고 거꾸로 남쪽으로 내려가는 관람코스를 추천한다. 그리고 이제부터 펼쳐지는 건청궁의 테마는 사뭇 즐겁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고백하려 한다. 건청궁을 지을 무렵 고종이 생부 흥선 대원군의 간섭에서 벗어나 친정할 것을 표명한 의지는 비장했다. 재위 10년이 된 청년 군주의 정치적 이상을 펼칠 근거지였으나 건청궁을 짓고 그곳에 살던 왕실에 닥친 비극은 조선왕조가 역사의 내리막길로 치닫는 시작을 알리는 처참한 현장이었다.

고종의 빛과 어둠 건청궁

건청궁 건물은 단청을 올리지 않은 백골집이지만 곳곳에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섬세한 치장으로 격조 있는 규모를 보인다. [사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건청궁 건물은 단청을 올리지 않은 백골집이지만 곳곳에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섬세한 치장으로 격조 있는 규모를 보인다. [사진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경복궁 중건이 흥선대원군에 의해 주도되었다면 건청궁은 고종이 주도하였다. 고종은 경복궁 서북쪽에 건청궁 공사를 비밀리에 진행하였다. 건청궁 건립은 흥선 대원군의 정치적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 정국을 이끌어 나가겠다는 고종의 자립을 위한 친정 의지의 표명이었다. 경복궁 중건 후 5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신료들의 반대가 심했으나 고종은 공사비 조달은 임금의 사비인 내탕금(內帑金)으로 짓는다고 하며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처음에는 역대 임금들의 어진을 보관할 전각이라는 명목을 내세워 건청궁을 지었으나, 그 뒤 고종과 명성황후의 거처로 사용하거나 외교관 접대의 장소로 활용되었다.

건청궁 건물은 단청을 올리지 않은 백골집이지만 곳곳에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섬세한 치장으로 격조 있는 규모를 보인다. 왕이 사용하는 장안당과 왕비가 머무는 곤녕합, 그리고 장안당 뒤에 서재로 관문각을 지어 마치 사대부가의 사랑채, 안채, 서재를 연상시키는 구조로 구성했다. 건청궁은 연대 상으로는 경복궁의 전각 중에서 가장 나중에 건립되었으며 일제에 의해 가장 먼저 사라진 전각이다.

그리고 건청궁은 우리나라 최초로 전기가 가설된 장소였다. 토마스 에디슨이 백열전구를 발명한 것은 1879년 10월인데, 그로부터 불과 7년이 지난 1887년 1~3월 사이에 건청궁에 전등을 설치하고 불을 밝힌 것이다. 당시 건청궁의 전등 설치는 중국과 일본보다 2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1882년(고종 19년) 5월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조선은 이듬해 9월 민영익을 전권대사로 한 11명의 사절단을 보빙사(報聘使)로 미국에 파견했다.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이듬해 공사 푸트가 내한하자 이에 대한 답례와 양국 간 친선을 위해 사절을 파견한 것이다. 고종이 미국에 파견한 사절단은 미국 체류 기간 중 전깃불이 뉴욕과 보스턴의 밤거리를 비추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고종은 미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보빙사의 강력한 주청으로 전기 도입을 서둘렀고 미국의 에디슨 전기회사 측도 조선을 동양 진출의 교두보로 삼기 위한 계획에서였다.

당시 에디슨 램프 사의 총지배인 프란시스 업튼이 1887년 4월 18일 자로 사장 에디슨에게 보낸 업무 연락서는 경복궁의 전등 시설은 에디슨 제품의 동양 판촉을 위해 시범케이스로 시공됐다면서 향후 일본 궁성에 설비될 시설과 함께 동양에서는 유일한 시설이라고 보고했다.

장안당(長安堂)

건청궁 서쪽 영역의 장안당은 왕의 거처로, 장안(長安)은 오래도록 평안하다는 뜻이다. [사진 이향우]

건청궁 서쪽 영역의 장안당은 왕의 거처로, 장안(長安)은 오래도록 평안하다는 뜻이다. [사진 이향우]

장안당의 남쪽 누각 추수부용루(秋水芙蓉樓)는 가운데 대청을 두고 서편에 누마루 형식으로 지은 집이다.[사진 이향우]

장안당의 남쪽 누각 추수부용루(秋水芙蓉樓)는 가운데 대청을 두고 서편에 누마루 형식으로 지은 집이다.[사진 이향우]

건청궁 서쪽 영역의 장안당은 왕의 거처로, 장안(長安)은 오래도록 평안하다는 뜻이다. 장안당 현판 오른쪽 상단에 임금의 글씨를 뜻하는 ‘어필(御筆)’이 전서체로 새겨져 있고, 왼쪽 하단에는 ‘주연지보(珠淵之寶)’, ‘만기지가(萬機之暇)’라는 낙관 두 개가 새겨져 있다. 주연지보는 고종의 낙관이다. 1864년 고종이 열두 살의 소년 군주로 즉위하던 해에 쓴 창덕궁 관물헌의 ‘집희(緝熙)’와는 그 필체에서 느껴지는 연륜이 다르다.

장안당(長安堂)은 당시 조선 사대부 상류 주택의 건축 양식 중에도 가장 격식을 갖춘 집이다. 왕이 소대(召對: 왕이 신하를 불러 만나는 것, 특히 낮에 경연관을 불러 정례의 경연 외에 따로 강론을 주고받는 것)를 행하거나 신하를 만나는 곳으로 사용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편전의 용도로 쓰인 것으로 추측된다. 고종은 이곳에서 미국, 영국, 러시아 등의 공사를 접견하면서 여러 정치적인 문제를 처리했다.

장안당은 실내 복도각을 통해 곤녕합 서행각으로 연결되었다. 장안당의 남쪽 누각 추수부용루(秋水芙蓉樓)는 가운데 대청을 두고 서편에 누마루 형식으로 지은 집이다. ‘추수부용(秋水芙蓉)’은 가을 물 속의 연꽃이 바람에 몸을 맡겨 스스로 미소 짓는 모습이다. 추수부용루는 날아갈 듯 아름다운 추녀 곡선하며 사뿐히 올라앉은 누각의 모습이 그 이름처럼 어여쁜 한 송이 연꽃이다. 헌종의 거처였던 창덕궁 낙선재 누각과 그 형태와 구조에서 닮았다. 이 누각은 곤녕합의 사시향루(四時香樓)와 짝을 이룬다.

장안당 뒤편으로 한국 최초의 양관(洋館)이 있었는데 사바틴에 의해 지어진 관문각(觀文閣)은 서양식 건물로 궁궐에 지어진 최초의 서양 건물이었다. 관문각은 원래 전통적 목조건물이었으나, 러시아인 건축가 사바친의 설계 때문에 2층 벽돌조 건물로 개조되었다. 고종은 관문각에서 책을 읽고 외국인들을 맞이했다. 사바틴은 이곳에서 시위대 부대장으로 고종을 호위하고 있었다.

곤녕합(坤寧閤)

곤녕합 옥호루. 옥호루는 옥으로 만든 호리병이라는 뜻으로 원래 옥호빙(玉壺氷.옥병 안의 얼음)의 줄인 말인데 깨끗한 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 한 말이다. [사진 이향우]

곤녕합 옥호루. 옥호루는 옥으로 만든 호리병이라는 뜻으로 원래 옥호빙(玉壺氷.옥병 안의 얼음)의 줄인 말인데 깨끗한 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 한 말이다. [사진 이향우]

땅이 편안하다는 뜻의 곤녕합(坤寧閤)은 왕비의 덕성을 나타내는 이름으로 왕의 거처인 장안당의 동편에 있다. 곤녕합에 딸린 남쪽 누각 옥호루는 옥으로 만든 호리병이라는 뜻으로 원래 옥호빙(玉壺氷.옥병 안의 얼음)의 줄인 말인데 깨끗한 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 한 말이다. 옥호루의 동쪽 면에 있는 사시향루(四時香樓) 현판은 장안당의 추수부용루와 짝을 이루는 이름이다. 그 이름에서 여성적인 분위기가 한껏 느껴지는 ‘사시향(四時香)’은 네 계절 끊이지 않고 꽃향기가 풍긴다는 뜻이다. 마치 이곳에 머물던 주인, 명성황후를 그려낸 듯한 이름이다. 옥호루 누각을 통해 담장 너머 그린 듯 아름다운 향원정이 보였을 것이다. 이곳에서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는 45세의 짧고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1895년(고종 32년) 음력 8월 20일(양력 10월 8일) 일본인에 의해 명성황후가 시해당한 사건을 을미년의 변고,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 한다.

건청궁은 1895년 을미사변 후 주인을 잃고 1909년경 일제에 의해 완전히 헐려서 없어졌다가 98년 만에 관문각을 제외한 일대가 복원되어 2007년 10월부터 일반에 공개되었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