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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안혜리의 시선

대통령님, "언론은 오염물질" 에 동의하십니까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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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민주당, 새벽 4시 법사위 강행
김의겸 '알박기'로 절차 무력화도
언론 혐오에 눈감고 즐길 것인가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5일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5일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님.
대통령님은 "신문을 꼼꼼하게 읽을 뿐만 아니라 인터넷 댓글까지 다 본다"는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 말을 믿고 한번 읽어봐 주십사 이 글을 씁니다. 구중궁궐 같은 청와대 안에 계셔서 혹시 모르실 수도 있는데, 지금 바깥세상은 어지럽기만 합니다. 대체 부모랑 집에서 밥을 같이 먹을 수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대통령님이 지난 1년 반 동안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사이에 완전히 꼬여버린 난수표 같은 코로나 19 방역 대책 탓에 고통받는 국민 얘기는 굳이 하지 않겠습니다. 오늘은 언론통제법, 또는 언론재갈법으로 불리는 언론중재법 개정안 말씀을 드리려 합니다. 삶에 지친 국민들이 당장 내 일 아니라고 방관하는 사이 여당이 180석을 무기로 폭주해버린 그 법안 말입니다.

대통령님의 친정인 더불어민주당은 어제(25일) 새벽 4시에 국회 법사위에서 단독으로 이 법안을 강행 처리, 이제 본회의만 남겨놓고 있습니다. 누군가의 생사가 달린 일도, 긴박한 외교적 결정도, 경제적 문제가 얽힌 일도 아닌데 뭐가 그리 급했을까요. 문재인 정부 사람들이 적대시하는 보수 언론뿐 아니라 평소 관보처럼 이 정권과 같은 생각을 써온 자칭 진보지, 그리고 친여 성향의 국내 언론 단체는 물론 전 세계 언론 단체까지 가세해 모두 우려하고 반대하는 법안에 왜 이렇게까지 무리수를 두는지 대통령님은 혹시 아십니까.

김의겸 의원은 지난 18일 언론통제법과 관련한 안건조정위에 '알박기'로 들어가 언론 혐오 발언을 쏟아냈다. [연합뉴스]

김의겸 의원은 지난 18일 언론통제법과 관련한 안건조정위에 '알박기'로 들어가 언론 혐오 발언을 쏟아냈다. [연합뉴스]

지난 18일 국회 문체위 안건조정위원회(이하 조정위)에선 더 기막힌 일이 벌어졌죠. 여야 견해차를 좁혀 최대한 합의를 끌어내기 위한 장치가 조정위인데 민주당은 이 절차마저도 무력화했습니다. 한국일보 '취재'로 드러난 그 날 53분의 기록은 너무 기가 막혀 오히려 헛웃음이 날 지경입니다. 여야 3명씩의 구성 원칙을 민주당은 꼼수로 대응했습니다. 정의당마저 법안에 반대하니 민주당 2중대인 열린민주당 소속이자 문재인 청와대의 두 번째 대변인을 지낸 한겨레 기자 출신 김의겸 의원을 야당이라 우기며 '알박기'를 한 겁니다. 여 4 대 야 2. 게임 끝. 애초 제대로 된 합의는커녕 논의하는 시늉조차 할 생각이 없었던 겁니다. 진짜 야당 의원들이 퇴장한 가운데 김 의원은 자기 몫을 충실히 해냈습니다. 조정위 김승원 민주당 의원 표현대로 "야당 위원이 없는" 가운데 김의겸 의원은 언론을 "굴뚝 오염물질"에 비유하며 "사회 갈등과 분열을 조장하고 극단적 대립을 부추긴다"는 발언으로 언론에 대한 증오를 표출하며 심의를 끝냈습니다. 김 의원은 아마 언론 보도만 아니었다면 청와대 재직 당시 업무상 비밀을 이용한 부동산 투기가 드러날 일도, 그래서 대변인을 불명예스럽게 관둘 일도 없었을 거라 원망하며 이런 적개심을 품는 것이겠지요. 언론통제법을 적극적으로 찬성해온 게 500억 원대 횡령·배임으로 구속된 이상직 의원(전 민주당)과 허위 서류로 자녀 입시 결과를 조작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인 것만 봐도 이런 추측이 결코 비약이 아닐 겁니다.

대통령님,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대선 국면인 지난 2012년과 2017년 "민주주의의 기본인 언론 자유가 정권을 지켜준다"던 대통령님의 발언까지 소환할 필요도 없이 불과 며칠 전에도 "언론 자유는 누구도 흔들 수 없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런데 청와대 대변인으로 1년 넘게 대통령님의 생각을 밖으로 전달해온 인물이 사적 원한을 앞세워 이렇게 대통령님 발언과 정반대의 말을 쏟아내며 언론통제법 강행에 총대를 메다니요. 지금이야말로 대통령님이 '격노'하셔야 하는 타이밍인 거 같은데 어찌 된 일인지 입을 꾹 다물고 계시네요.

잇따른 군내 성폭력 사망 사건 등 국민들 보기엔 분명 대통령이 최종 책임자인데 사과나 설명 대신 격노라도 해오신 대통령님이 왜 이번 사안에는 침묵하시는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조심스레 추측해봅니다. 혹시 국민 앞에선 립서비스로 "언론 자유"를 말하고, 실은 김 의원처럼 언론을 "오염물질"로 규정해 재갈을 물리는 데 동의하시는 건가 하고요. 만약 그렇다면 앞서 드린 질문을 이렇게 바꿔야겠네요. 대통령님은 정말 일각의 주장처럼 "퇴임 후 안전장치" 마련 차원에서 이런 반(反)민주적이고 구시대적인 악법 통과를 내심 바라고 계신 겁니까. 정권이 안 바뀌면 더 좋고, 설령 바뀌더라도 정권 비리를 들출 언론의 싹을 잘라버리겠다고 마음먹으신 겁니까.

이런 세간의 의혹을 믿고 싶지 않습니다. 이 나라를 중국처럼 아예 아무 문제(실은 문제 제기)가 없는 나라나, 탈레반처럼 무자비한 숙청이 가능한 나라로 만들고자 하는 게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민주당의 폭거를 멈춰주십시요. 부탁드립니다.

안혜리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