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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에서 이상용(한국응원단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남북이한데 어울려 합동응원을 하게되다니. 처음에는 남북간 경직된 응원, 이에 따른 부작용 내지는 만약에 있을지도 모르는 불상사 등 상서롭지 못한 생각에 잡혀있던 내게는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북경아시안게임이 갖는 의미가 남북화해무드조성에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남북한간의 합동응원만큼 가슴에 와 닿는게 있을 손가.
남북화해는 서로간의 두터운 벽을 허무는데 달려있다고 믿는 믿음엔 변함없고 이점에서 남북합동응원은 큰 몫을 해줄게 틀림없다.
23일 남자하키 한국-홍콩경기가 벌어진 국립올림픽스포츠센터 하키경기장에서의 일이다.
나를 포함해 한국대표응원단 12병이 경기장을 찾았을 때 경기장엔 이미 북한응원단 2백여명이 질서정연하게 앉아 한국을 응원하고 있었다.
우리일행이 미처 표를 구하지 못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동안 북한은 비록 경기는 없었지만 한국을 응원하기 위해 새벽같이 나와 대기했었다고 했다.
『남한을 응원하러 왔시오. 우리는 김일성 수령님 말한마디면 「쫙」이오. 남한사람들은 왜 그렇게 많이 갈라지오.』 뒤늦게 한국관광단 20명이 경기장에 들어와 합세했지만 내평생 이처럼 낯뜨거웠던 순간은 없었다.
이보다 앞서 열린 여자소프트볼 남북대결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고 내겐 또 다른 감흥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막연하게 기대해봤던 남북합동응원. 그러나 막상 내가 앞장서 남북합동응원단을 이끌고 보니 역시「하나」 임이 틀림없고 「하나」 이어야한다는 강한 확신을 갖게된다.
함께 어울려 『코리아 파이팅』을 외쳐대고 『밀양아리랑』 『도라지타령』 등을 합창하는 동안 남북응원단은 뜨거운 동포애로 흥건했고 경기가 끝난 후에도 남북동포들간의 격의 없는 대화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서로 어깨동무를 한 채 『아리랑』 『통일의 노래』를 부르는 동포들이 있었고 삼삼오오 짝을 지어 「술자리」를 찾는 동포들도 간혹 눈에 띄었다.
경기 중엔 한국관광단 중 한 분이 뛰쳐나가 시원한 콜라 2백잔을 주문해 돌리자 북한동포들은 서슴없이 『고맙다』며 반갑게 받아 마시는 흐뭇한 풍경도 볼 수 있었다.
때마침 이 광경을 지켜본 한국선수단 고위임원들은 한결같이 『응원이 이렇게 남북동포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한데 묶어줄줄 몰랐다』고 흡족해하면서 앞으로 응원단 지원에 발벗고 나서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뒤늦게나마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명색이 한국응원단장인 내가 ID카드 하나 없이 경기장입장권을 구하러 이리 뛰고 저리 뛴다면 말이나 될법한 일인가.
우선 중국인들에게 꼴이 말이 아니고 북한동포보기에도 꼴사납게 보일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북한응원단은 무척 질서정연하고 조직적인게 두드러졌다.
응원단원은 정율성 단장(59)을 비롯한 예술단원 7명으로 구성돼있는데 한국과 같은 다양한 메뉴(?)가 없이 고작 박수를 치거나 『아리랑』노래를 합창하는 정도였다. 양적인 면을 차지한다면 응원수준은 초보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고나 할까, 아무튼 보잘 것 없다는게 내 소견이다.
반면 우리사정은 어떤가.
오기 전에 우려한 바대로 한국응원단은 마치 모래알 같은(?) 관광객들뿐이다. 체육인 격려단 7백명도 도무지 찾아보기 힘들다.
여자소프트볼·남자하키·남자축구·남자체조경기장을 찾은 한국인 응원단수는 모두 합쳐야 5백명 남짓에 불과한 실정이다. 그나마 마지못해 응원 나온 관광객들이 대종이어서 기대했던 조직적인 응원전을 펼치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다. 이 때문에 그좋던(?) 목소리가 벌써 쉰 상태다.
듣기로는 이날 만리장성은 온통 한국인 일색이었다고 했다. 발디딜 틈조차 없을 만큼 한국인들이 줄을 잇고 있었다는 것이다. 우려한 그대로다.
대회 사흘째부터는 본격 관광시즌이라고 한다. 4천명을 훨씬 웃도는 한국인들은 이제부터 연변을 찾아, 상해나 계림을 찾아 나설 것이라는게 한 여행사 관계자의 귀띔이다. 그렇다면…, 이미 볼장 다본게 아닌가.
이에 반해 북한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이곳에 머물면서 선수단응원을 계속한다고 한다. 한국과는 크게 대조적인 분위기다.
내가 속한 뽀빠이 패밀리도 곤경에 빠져있다. 대식구(12명)를 거느리기조차 힘겨울 정도다. 하다못해 모국으로부터 후원자라도 모집해야할 판이다.
뒤늦게 응원의 필요성을 인식, 장충식 선수단장이 격려금지원을 다짐하고 ID카드발급을 약속하고 있다. 뒤늦게나마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 경기가 13일이나 남았다. 남은 기간 최선을 다해 한국선수단의 사기를 고취시키고 동시에 「민족화합의 대서막」을 위해 맡은바 응원소임을 다하는게 내게 주어진 책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수단·응원단, 그리고 이를 주도하는 내가 손발을 맞추는게 중요하다. 서로간의 책임회피 보다는 합심해 결실을 맺도록 노력하는 자세가 절실히 요구되는 때다.
우선 남북한 간의 대립보다는 선의의 경쟁을 유도하고 민족화합을 위한 분위기 조성에 힘쓸 생각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북합동응원단을 효율적으로 이끌어가는게 중요하다고 여겨지며, 나역시 응원의 초점을 여기에 맞춰 운영할 계획이다.
또 민속명절인 10월3일엔 낯설고 물선 이국타향이긴 하나 북한응원단을 초청해 「한민족대화합잔치」를 베풀까한다.
이에 대해서 이미 정율성 북한응원단장과 원칙적인 합의를 본바 있어 성사여부는 꽤 낙관적이다. 남과 북이 한데 어울리는 한민족 대축제, 구수한 막걸리에다 송편을 빚어놓고 펼치는 한마당잔치는 듣기만 해도 벅찬 감격을 갖게된다.
분명한 건 남북동포는 역시 배달민족이라는 자긍심이다. 합동응원단을 통한 남북동포들간의 동질성회복은 다름 아닌 남북통일을 위한 서곡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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