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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Review] 그들의 삶이 곧 시대의 삶이 되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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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인물로 보는 서양 고대사

허승일 외 지음, 도서출판 길, 900쪽, 3만5000원

'인물로 보는 서양 고대사'라는 제목 자체가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역사를 위인과 영웅들이 펼치는 드라마로 보던 때가 있었다. 그 극단이라 할 토마스 카알라일은 "영웅은 문인, 역사가, 성직자, 제왕의 몸으로 역사에 등장해 역사를 이끈다"고 보았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계급 사관을 거쳐 20세기 전반부터 개인보다 집단이나 구조에 주안점을 두는 사회사가 유행했고, 1980년대 이후 이른바 포스트모던 역사 이론이 맹위를 떨치면서 일상사, 미시사 등이 부각됐다.

이런 흐름 속에서 개인은 사회.문화.구조.언어 등의 꼭두각시가 되어버린 듯하다. 서양 고대사를 '인물로 보려는' 이 책과 필자들의 취지는 역설적으로 바로 이런 역사학의 흐름을 감안할 때 그 뜻이 깊다.

1939년생부터 70년대 생에 걸친 서양 고대사, 고전학, 고고학 분야 우리나라 연구자 31명이 필자로 참여해 39명의 인물을 다뤘다. 고대 그리스, 로마 공화정, 로마 제정, 3부로 나누어 각 부의 첫 머리에 각 시대의 약사(略史)를 싣고, 책 말미에 용어 해설을 붙였다.

정치적.군사적 업적을 이룬 인물들이 주를 이루지만 고대 희랍 서사시인 헤시오도스, 서양 고대 의학의 완성자 갈레노스, 서양 건축의 아버지로 평가받기도 하는 마르쿠스 비트루비우스 폴리오, 기독교 사상가 성 아우구스티누스 등도 있다. 900쪽 분량이지만 각 인물이 차지한 지면은 평균 잡아 20여 쪽 남짓이니 주마간산이 아닌가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각 인물을 다룬 글 하나하나가 매우 알차다.

만일 인물들의 삶과 업적을 시대 순으로 나열하고 요약하는 데 그쳤다면, 굳이 이 책을 읽을 필요 없이 인터넷 검색을 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한 인물에 관한 모든 것을 보여주려는 욕심을 접고, 인물의 역사적 의미와 특징을 집중적으로 드러내는 일종의 선택과 집중 전략에 충실하다.

예컨대 로마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 바르카에 대해 차영길 경상대 교수는 '살아서는 로마의 공포였지만 죽어서는 로마의 영광을 상징하는 신화로 변모되어간 모순적 상징화'로 설명한다. 적장인 한니발에 시달리며 익힌 전술에 장기간의 전쟁을 통한 시행착오 과정에서 단련되고 정비된 로마 시민군의 완성도가, 로마가 한니발 전쟁 이후 지중해 전체를 급속히 장악해 간 요인이었다는 것.

서사시인 헤시오도스에 대해 백경옥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그의 '신통기'가 그리스인의 정체성과 통치체계의 정당성을 노래한 데 비해, '일과 나날'은 통치 계급의 부정의를 비판하고 그 대안으로 새로운 정의(正義) 개념을 제시했다고 지적한다. 이는 농업 중심적인 호메로스식 귀족 사회에서, 교역 및 상업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부의 축적이 이루어지는 역동적인 사회로 가는 도정에 있는 그리스 사회의 변화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살라미스 해전의 영웅이었지만 훗날 페르시아에서 조국의 반역자로 삶을 마친 풍운아 테미스토클레스. 그에 대한 백경옥 박사의 일종의 총평이 인상적이다. 우리가 늘 역사 인물에 주목해야 하는 까닭을 엿볼 수 있다고 할까.

"조국의 이익과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는 언제든지 필요한 수단을 능숙하게 조절하는 테미스토클레스의 능력은 현대인들에게도 매우 강한 인상을 준다. 기꺼이 어리석음을 용서하고 타협하고 정적들과 화해하는 그의 능력은 기존 체제에 저항하기보다는 그 체제와 더불어 일하고자 하는 인물의 전형이었다. 그의 삶은 어떤 면에서는 한 시대를 이끌어 간 위대한 지도자들은 도덕적으로 고결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굳이 외국 서평의 예를 따라 말해보면 이렇다. 이 책은 모든 고등학교와 대학교 도서관이 갖추어 둘 필요가 있고, 문필 관련 일에 종사하거나 역사에 폭넓은 관심을 지닌 독자에게도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할 수 있다. 바라기로는 우리 고대사나 중국 고대사, 그 밖의 역사 영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완성도와 체제를 갖춘 책들이 많이 나왔으면 한다. 인터넷 검색으로는 얻은 파편화된 정보에 책이 맞서자면 체계성과 깊이를 갖춰야 할 것인데, 그 좋은 사례가 바로 이 책이 아닐까 한다.

표정훈<출판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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