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질서 재편이 주는 교훈/장두성(중앙칼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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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최근 중앙일보사가 주최한 외국 저명언론인들의 토론회에서 필자는 지금 급속히 진행되고 있는 국제질서의 재편과정에 관한 여러가지 새로운 견해들에 접할 기회를 가졌다. 그 중에서 특히 우리에게 참고가 될만한 견해는 적어도 필자의 생각으로는 다음 세가지가 있었다.
첫째,완전한 통일을 앞둔 독일의 언론인 테오 좀머가 지적한 독일통일의 모델에 관한 것이다. 그의 말을 종합해보면 대개 이런 것들이다. 무엇보다도 독일통일은 서독이 의도적으로 추진한 정책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몇가지 우연한 요인들에 의해 저절로 굴러온 것이라는 것이다.
그가 지적한 요인으로는 첫째가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둘째가 동구의 반체제인사들이 축적해온 사상적 선례,셋째가 압제에 대항해서 일어선 동독시민들의 용기등이다. 이러한 요인들이 상승작용을 이루어 1년전까지만 해도 당사자들 조차 오히려 요원해지고 있다고 판단했던 통일이 급격히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는 통일이 이처럼 「저절로」 이루어지고 있는 과정에서 통일을 위해 동ㆍ서독이 정부대 정부간 협상을 한 것도 아니고 서로 반대되는 체제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진 것도 아니며 오직 동독국민들이 투표로 공산당을 몰아내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과정을 『우리는 통일을 앞당기려 서두르지 않고 역사의 흐름에 맡겼다』고 표현했다. 다만 그 역사의 흐름의 조역으로서 20여년 동안을 동ㆍ서독인들간의 접촉을 금지한 일이 없으며 서독시민이 동독 정부관리와 만나고 왔다고 해서 그를 감옥에 넣는 일도 없었으며 서독국민이 공산당에 오염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동독이 자국 국민들을 서방으로부터 고립시키려 했을 때 이에 똑같은 대응으로 서독국민을 공산세계로부터 차단시키려 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결국 서독사회가 향유하고 있는 사상의 자유와 경제적 번영을 바탕으로 한 화해정책이 오랜기간 쌓여 무력없는 통일을 저절로 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테오 좀머가 말한 이와같은 통독방식은 비슷한 방식으로 한반도가 통일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 성급해 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참고가 될 것이라고 본다.
이 모임에서 접한 둘째 견해는 민족주의가 고정된 개념이 아니고 진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였다.
누구도 민족주의의 진화론이란 표현은 쓰지 않았다. 그러나 18,19세기를 전성기로 해서 제국주의 팽창정책으로 나타났다가 결국 두차례 전쟁을 촉발시켰던 유럽의 민족주의는 그 쓰라린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 국경을 초월하는 대통합을 이루며 보다 넓은 공동체의식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견해에는 이의가 없었다. 그 통합은 경제ㆍ사회적 상호의존구조가 확대강화됨으로써 개개의 민족주의는 전쟁 아닌 평화공존의 바탕을 굳혀가며 범유럽 통합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견해가 미ㆍ영ㆍ독ㆍ불 언론인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이에 비하면 아시아는 아직 그런 진화의 초입에도 접근하고 있지 못하며 특히 남북한은 그 보다도 더 뒤처져서 민족주의의 기본요건인 국토의 통일조차 요원한 과제로 남아 있는 상태다. 통일을 이루고 민족주의를 온전한 형태로 회복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유럽처럼 아시아 공동체로 진화시키는 것이 역사적 추세라면 갈 길은 멀고도 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세번째 견해는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낙관론이다. 2차대전이래 미ㆍ소 양대강국이 세계를 분할하고 인류를 파멸로 몰고 갈 듯한 핵경쟁을 하다가 그 중 하나가 스스로 탈진상태에 빠져 붕괴한 상황에서 이라크사태는 일어났다. 이에 대응해서 군사ㆍ경제 강대국들이 분열하지 않고 단결해서 침략자를 응징하기로 합의하게 된 것은 유사이래 처음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토론자들은 새로 형성되는 세계질서의 가장 낙관적 전망을 제시했다. 미국은 냉전에서 승리했지만 지배자가 되기보다는 지도역할만 하기로 선택하고 소련은 냉전에서 패배했지만 과거 열전의 패전국과는 달리 모욕을 느끼거나 그로 인한 복수심을 갖지않고 오히려 재기의 원동력으로 삼고 있다.
그런 배경에서 소련도 무력에 의한 분쟁해결방식에 반대하는 서방주도의 연합전선에 가세하는,냉전이전에는 상상조차 못할 선택을 한 것이다.
이 모든 변화의 원동력으로는 민주화ㆍ개방화가 지적되었다. 공산권의 전체주의든 제3세계의 독재체제든 국민들의 자유로운 의사표시가 가능해졌을 때 모두 붕괴했으며 이 범세계적 민주화 추세는 어떤 군사력이나 사상에 의해서도 되돌려질 수 없는 미래의 조류가 될 것이라는 점이 강조되었다.
이와같은 여러 변화의 가닥들을 종합해볼 때 앞으로 불확실성의 요소는 많지만 세계는 과거 어느때보다 낙관적ㆍ평화적 전망을 안고 21세기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 이 토론회의 결론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결론과 함께 우리는 동서냉전의 종식으로 한반도문제가 강대국들간 관심의 핵심으로부터 변두리로 밀려나고 있다는 앙드레 퐁텐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것이다.
이말은 한반도문제가 냉전시대의 강대국 세력균형의 갈등과 대결구도에서 벗어나 독자적 역할과 책임으로 평화공존속의 경제블록화 추세속으로 한반도의 위상이 새로 정립되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 주는 부분이다. 세계질서의 재편은 따라서 한반도 전체의 힘의 결집,즉 통일을 재촉하는 쪽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뜻한다. 이러한 조류에 또다시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는 남북관계의 개선이야말로 시간을 다투는 민족적 과업이다.<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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