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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제국' 미국은 어디로] 15. '제국'의 반항아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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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쾅 쾅 쾅…."

지난 26일 오전 6시10분.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중심가에 있는 라시드 호텔에 투숙 중이던 폴 울포위츠 미 국방부 부장관은 연속적인 로켓 포격음에 잠을 깼다. 이라크전 기획자로 알려진 울포위츠는 3박4일 일정으로 이라크를 둘러보던 중이었다.

로켓은 호텔 3층과 8층, 11층에 명중했다. 12층에 투숙하고 있던 울포위츠는 경호원과 함께 황급히 복도로 나갔다. 그는 매캐한 연기를 뚫고 비상계단을 통해 호텔 로비로 내려갔다. 군정청 요원과 미 군속이 숙소로 쓰고 있는 이 호텔 로비는 일대 혼란에 빠졌다. 로켓포 공격에 놀란 투숙객들이 잠옷 바람으로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화를 면한 울포위츠는 사건 직후 CNN에 출연해 "이런 테러 행위가 바로 우리가 이곳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이유"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같은 시간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은 NBC방송에서 "공격이 이토록 장기간 지속될 줄은 몰랐다"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테러리스트가 로켓포 공격을 통해 워싱턴에 던진 메시지는 분명했다. '미국은 물러가라'는 것이었다.

2천2백년 전 카르타고의 한니발은 끈질긴 도전으로 로마제국을 괴롭혔다. '팍스 로마나'는 변방의 끊임 없는 저항에 대한 응전과 제압 위에 구축된 불안한 평화였다. 패권에는 저항이 따르게 마련이다. 21세기의 유일 초강대국 미국이 이룩한 '팍스 아메리카나'역시 반미주의를 앞세운 지구촌 반항아들의 갖가지 도전에 직면해 있다.

반미주의는 국제정치적 측면에 경제적.문화적.심리적 요인이 뒤섞인 혼합물이다. 또 지역별로 맥락이 다르다. 석유정책과 친(親)이스라엘 정책 때문에 미국은 20여개 중동국가에서 반발을 사고 있다. 국제정치 무대에서 프랑스.독일 등 유럽국가들은 미국의 일방주의적 행태에 싸늘한 눈길을 보내고 있다. 경제적 측면에서 미국은 반(反)세계화주의자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고 있다.

그러나 반미감정을 뒤집어 보면 그 밑바닥에는 미국의 파워와 문화에 대한 열등감과 시기심이 도사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뉴욕 타임스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먼은 "반미주의자들은 흔히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맥도널드 햄버거를 먹으면서 반미구호를 외친다"고 꼬집었다.

미국의 경제적 헤게모니에 저항하는 가장 큰 세력은 반세계화 운동이다. 이들은 미국이 국제통화기금(IMF).세계무역기구(WTO) 같은 국제기구들을 내세워 지구촌의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 현상을 심화시키고 있다고 주장한다. 또 미국이 주도하는 세계화는 코카콜라.맥도널드.카길 같은 미국 기업들의 배만 불릴 뿐이라고 맞서고 있다.

이들은 미국이 참가하는 국제행사마다 쑥대밭을 만들고 있다. 1999년 11월 미 시애틀에서 열린 WTO 각료회의를 무산시킨 이래 반세계화주의자들은 IMF 워싱턴 총회(2000.4), 이탈리아 제노바 선진 8개국(G8) 정상회담(2001.7), 멕시코 칸쿤의 WTO 각료회의(2003.9) 등을 최루탄과 화염병이 난무하는 극렬시위의 현장으로 만들었다. 뉴욕 타임스는 반세계주의자들을 일컬어 "현재 지구상에는 미국과 '새로운 길거리 권력(A New Power in the Streets )'이라는 두 개의 수퍼파워가 있다"고 보도했다.

알카에다와 오사마 빈 라덴으로 대표되는 이슬람 테러 조직은 미국에 가장 격렬하게 저항하는 반미세력이다. 이슬람 테러 전문가인 요제프 보단스키에 따르면 빈 라덴을 비롯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미국을 이슬람 세계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원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미국에 대한 정면공격은 불가능하므로 테러 공격을 통해 미국을 이슬람권에서 몰아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생각이다. 이 같은 신념은 2001년 9월 11일 미 경제력의 상징인 뉴욕 세계무역센터와 군사력의 상징인 워싱턴 펜타곤에 대한 항공기 자폭 공격으로 한 획을 그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9.11 테러 이틀 뒤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빈 라덴의 테러는 반세기에 걸친 미 중동정책의 난맥상에다 근대화에 실패한 이슬람 내부의 좌절감이 결합돼 분출된 결과였다. 그러나 부시 대통령은 이를 간과한 채 군사력이라는 하드파워를 앞세워 지나치게 단순하게 접근했다.

하드파워적 측면만 놓고 보면 부시는 지난 2년 간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 정권에 이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을 제거했다. 비록 빈 라덴은 여전히 오리무중이지만 알카에다 조직은 사실상 와해됐다. 부시는 지난 9월 "알카에다 지도자 중 70%가 체포되거나 죽었다"고 말했다.

리비아.시리아.이란 등 중동의 전통적인 반미국가들도 '자세 낮추기'에 여념이 없다. 80년대 미국의 공습을 두차례나 겪으면서도 반미를 외쳤던 리비아의 무아마르 카다피는 테러와의 전쟁에 협력할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부시가 손에 쥔 것은 반쪽의 승리다. 미 여론조사기관인 퓨 리서치 센터의 여론조사 결과는 그가 전쟁에는 승리했지만 평화에는 패배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라크 전쟁 이후 각국 국민의 미국에 대한 호감도는 일제히 하향 곡선을 그렸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지난해 61%에서 올해는 15%로 급락했다.

미국의 전통적인 동맹 관계도 흔들리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반세기 동안 지속돼 온 미국과 유럽의 '대서양 연합'은 파산 일보 직전이다. 또 사우디아라비아와 미국의 60년 동맹 관계도 흔들리고 있다.

미국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북한과 쿠바는 버티기로 맞서고 있다. 특히 북한은 미국을 상대로 핵 카드를 뽑아 들고 벼랑끝 전술을 구사함으로써 워싱턴을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은 최근 유출된 메모에서 "우리가 테러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는가, 패배하고 있는가"라고 자문했다. 조셉 나이 하버드대 케네디 스쿨 학장은 "세계화의 결과로 군사력 즉 하드파워의 역할은 점차 축소되는 추세"라면서 "21세기에도 미국이 세계 제1의 국가로 남아 있으려면 다자주의를 통해 소프트파워를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힘에 의한 로마의 평화는 군사력의 과잉전개(overstretch)를 초래했고, 이로 인한 힘의 공백을 변방의 반항세력이 파고들면서 로마제국은 결국 붕괴했다. 미국이 로마의 전철을 밟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워싱턴=특별취재팀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배명복 기획위원, 김민석 군사전문위원, 심상복 뉴욕특파원, 김종혁.이효준 워싱턴 특파원, 김진.최원기 국제부 차장, 신인섭 사진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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