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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한인지역 산불 현장] "불씨가 비처럼…뜬눈으로 밤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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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이웃 쇼핑몰 건물 지붕에서 불씨가 비처럼 떨어지는데 아무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 그저 꺼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죠."

50년래 최악의 산불이 강타하고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주의 샌버나디노시 델로사 애버뉴에 있는 '리스 리커스토어'(대표 박덕천). 28일 한국인 매니저 이종우씨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영화 같았던 화마(火魔)의 습격을 회상했다.

李씨는 "특히 가게 바로 앞 주택이 불에 탈 때만 해도 '이제 우리 가게도 끝장이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며 "이웃 쇼핑몰 건물 지붕과 주차해 놓은 차량에도 불길이 옮겨 붙었지만 주위 사람들과 힘을 합쳐 다행히 불을 끌 수 있었다"고 말했다.

남가주 지역에서도 피해가 가장 큰 지역 중 하나인 이곳이 산불의 습격을 받은 것은 25일 오전 9시쯤. 산기슭에서부터 연기가 오르기 시작하더니 6시간 만인 오후 3시쯤에는 마을 여기저기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아우성을 치며 마을을 빠져나가려는 주민들이 거리를 채웠다. 하늘은 연기와 재로 뒤덮여 주위는 어둑어둑해졌다. 李씨는 경찰의 인솔로 마을을 빠져나갔다 오후 5시30분쯤 가게가 걱정돼 되돌아왔다. 그는 마을 여기저기서 불길이 번져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발만 동동 구를 수밖에 없었다.

불난리 속에서도 가게의 주인 박덕천씨는 물이나 식료품 등을 차에 싣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주민들에게 직접 나눠주었다.

현재 한인 피해가 가장 우려되는 곳은 신흥 도시지역으로 교민들이 많이 이주하고 있는 로스앤젤레스 서북부 발렌시아 스티븐슨 랜치 지역이다. 28일 오후 늦게 이 지역에 접어들자 곳곳에 진입 통제구역이 생기고 짙은 연기로 한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뒤늦게 대피 소식을 접하고 한꺼번에 모여든 차들 때문에 도로는 주차장으로 변했다. 주택가에는 이미 잿가루가 수북이 쌓여 있었으며 매캐한 연기 때문에 숨을 제대로 쉬기 어려웠다.

불길이 치솟고 있는 산에서 불과 2~3마일 떨어진 곳에 있는 스티븐슨 랜치의 서던 옥스 커뮤니티에는 이날 오후 3시쯤 대피령이 내려졌지만 대부분 교민들은 귀중품과 간단한 옷가지를 차에 챙겨 놓은 채 집을 지키며 산불 진행상황을 지켜봤다.

이 지역에 사는 세실리아 리(33.여)씨는 "불길이 집을 덮치지 않는 한 이곳을 끝까지 지킬 것"이라며 "제발 불길이 주택가를 피해 능선을 따라 빠져나갔으면 한다"고 울먹였다. 산불이 채츠워스와 포터랜치 지역을 넘어 로스앤젤레스 북동부 발렌시아 지역으로 확산되고 있어 이 지역의 교민들이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산불 규모가 가장 큰 샌버나디노 카운티에선 지난 25일 한인 윤덕수(57)씨의 주택이 불에 탔으며 불길이 인근 지역으로 크게 확산한 28일에는 샌디에이고 카운티 스크립스 랜치의 캐시 박(50)씨 주택이 전소됐다.

로스앤젤레스=중앙일보 미주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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