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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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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역사는 미래를 여는 열쇠"라고 영국의 켄 로치(70) 감독은 말한다. 역사는 단지 흘러간 과거의 유산이 아니며, 역사를 되짚어 보는 것은 미래를 찾아가는 과정이란 얘기다. 그래서 로치의 영화에서 역사는 시대와 지역을 뛰어넘는 보편성이 느껴진다. 그의 새 영화 '보리밭을 흔드는 바람'이 올해 칸영화제에서 최고 영예인 황금종려상을 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보리밭을…'(2일 개봉)은 1920년대 아일랜드 독립전쟁을 배경으로 형제의 우애과 대립을 그린다. 이야기는 조국 독립을 위해 싸우는 1부와 영국이 물러난 뒤 내부 갈등을 담은 2부로 나뉜다. 본격적인 비극이 펼쳐지는 것은 2부다. 영국 연방에 남는 조건으로 아일랜드에 자치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두 나라 지도부의 타협이 이뤄지자 아일랜드는 격심한 찬반 양론에 휘말린다. 일단 자치권을 확보한 뒤 점진적으로 독립을 이루자는 온건파와 완전한 자주독립을 위해 계속 싸우자는 강경파의 노선투쟁이다.

겉으로는 같은 목표를 놓고 방법에서 의견이 갈린 것처럼 보이지만 문제의 본질은 그게 아니다. 그것은 파문을 들먹거리며 사람들을 협박하는 위선적 신부의 강론에서 드러나는데, 바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계급투쟁이다. 제국주의는 물러갔지만 가난한 농민의 삶은 전혀 나아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신 정부의 군대가 농민을 탄압하는 모습도 제국주의 군대와 별로 다를 게 없다.

이 과정에서 지주의 이익을 옹호하는 형 테디(패드레익 딜레니)와 농민의 편에 선 동생 데미언(킬리언 머피)은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적이 되고 만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것은 영화에선 별로 낯설지 않은 상황. 그러나 주인공이 형제라는 점은 특별한 비극을 예고한다.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는 멀리 아일랜드지만 이야기를 찬찬히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해방 전후 한국의 좌우 이념 대결을 떠올리게 된다.

이 영화는 자유를 위해 싸우던 동지들의 분열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스페인 내전을 다룬 로치의 전작 '랜드 앤 프리덤'(95년)과 많이 닮았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가 있다면 희망에 대한 관점이다. '랜드…'에선 할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주먹을 불끈 쥐는 손녀를 보며 한 가닥 희망을 찾으려 했다면 '보리밭을…'에선 그런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다. 억지로 희망을 찾기보다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편을 택하겠다는 감독의 의지가 느껴진다.

주정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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