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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어와 문화어(분수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불신의 근원으로 되어 있는 정치 군사적 대결상태를 해소한 기초위에서만 은을 낼 수 있습니다.』
남북 총리회담의 첫 기조연설에서 북측의 연형묵총리가 한 말이다. 남쪽 기자들간에는 약간의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은을 낸다』는 게 뭐야,빛을 낸다는 뜻인가,모르겠어… 비록 잠시지만 술렁거림이 있었다.
양주의 임춘심씨가 북측의 림춘길책임보좌관이 동생같다고 주장했을 때,『그 무슨 누구의 누이라느니 친척간이라 하며 왕청같은 사람을 등장시킨다』고 북측 대표단은 항의했다. 이를 들은 남측 기자들은 왕청이가 누구냐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북쪽에서 발간된 현대조선말사전(88년간 2권)을 뒤적여 「은」을 찾아본다. ㅅ 다음에 있어야 할 ㅇ이 없다.
한참동안 뒤적여보니 ㅇ이 ㅎ다음에 배열되어 맨마지막 순서로 되어 있다.
『은』…【명】 보람있는 값이나 결과. 『왕청』 【부】(방향이나 성질같은 것이) 전혀 달라서 엉뚱한 모양.
5일자 로동신문 서울발 기사에서 『조선의 어용신문들에 검은 손이 작용,너절한 걸각질을 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걸각질은 북한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다. 거렁뱅이질이라는 뜻인지 유추할 따름이다.
비록 많은 어휘는 아니지만 우리 언어습관과는 사뭇 다른 어휘가 북쪽에서 튀어나올 때마다 분단 45년의 언어 이질화현상을 실감하게 되고 낭패감을 맛본다.
66년 5월14일 김일성은 언어학자들과의 간담회에서 『조선어의 민족적 특성을 옳게 살려나갈데 대하여』라는 교시를 발표한 데 이어 언어발전의 터를 북한의 수도인 평양으로 결정하고 평양말을 중심으로 다듬어진 북한의 공통어를 문화어로 부르기를 결정했다.
서울말과 평양말이 지닌 차이만큼 남북간의 통일정책도 격차를 드러낸 남북 총리회담이었다. 차이를 확인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차이를 좁히는 게 통일의 걸음이다. 표준어와 문화어의 차이를 확인하면서 그 언어들을 서로가 주고받을 때 그 언어의 차이는 저절로 사라진다. 「가열찬」 「걸림돌」이라는 북의 언어가 이젠 남쪽에서 스스럼없이 사용되듯 사람의 왕래가 곧 말의 왕래며 그것이 또한 언어의 이질화를 극복하는 지름길임을 새삼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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