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동인『분수』|로터리 분수의 20년 시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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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세상을 피해서 사는 것도/아니며/세상을 멀리해서 사는 것도/아니며/세상을 등져서 살고 있는 것도/아니며/세상을 저주하며 살고 있는 것도/아니며/있는 자리에서 있는 사람끼리/어울리는 자리에서 어울리는 사람끼리/순수한 자리에서 순수한 사람끼리/엄연한 자리에서 엄연히 사는 사람끼리/고요히 /순결한 언어를/혜화동 로터리 뚫린 하늘, 그 순수한 무한을/곱게 뿜어 올리고 있는/이조의 같은 시인들/…/혜화동 로터리, 이곳은/장꾼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먼 곳도 아니고/가까운 곳도 아닌/내일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분수가 도는 곳』(조병화「혜화동 풍경」중)
한 직장을 연유로 해 서울 혜화동 로터리 분수에 모여 20년째 같이 시를 써오고 있는 시동인「분수」『이 시간에 분수처럼 퍼낼 것이 무엇이냐. 귀로에 만난 시우와 분수 옆에서 시간이 우리를 다 파멸시키기 전에, 이 보행이 우리를 다 갖다 버리기 전에 앉아서 시를 쓰고자 한다』며 71년 당시 보성중·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이생진 윤강노 이봉신 신협 신용대씨가 동인지『분수』를 내며 출범한 분수 동인은 최근 15번째 동인지『숨쉬는 분수』를 펴내며 직장과 시를 인연으로 한 그들의 끈끈한 정과 삶을 보여주고 있다.
20년 세월 동안 보성중·고등학교도 강남으로 이전하고 동인들도 대학강단을 찾아 대전·청주 등지로 뿔뿔이 흩어져 윤강로씨만 보성에 남아 교단을 지키고 있지만 그들의 시혼과 대화는 여전히 보성과 예전에 보성이 자리했던 혜화동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역시 보성의 교사였던 김준회씨를 영입, 동인의 수를 불리며 해가 거듭됨에 따라 더욱 두꺼워지는 동인지를 펴내고 있다. 동인지 표지 그림도 역시 보성의 교사출신 화가인 전창운 오수환씨가 도맡아 그려주고 있어 학교라는 한「직장」의 연이 끈끈함을 느끼게 한다.
시적 경향, 지역 혹은 출신 문예지 등에 따라 모이고 흩어지는 시동인 세계에서 분수동인이 20여년간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동인으로서의 시적 지향점이 없었기 때문. 한때 몸담았던 직장이라는 연줄의 나약함만큼이나 동인으로서의 그들의 시적 지향점도 나약하다.
노장철학 냄새를 풍기는「물」시리즈를 쓰고 있는 신협, 인간의 불완전성을 서정적으로 그리며 인간성 회복을 노리는 윤강로, 삶의 윤리성을 뚝심 있게 캐 가는 신용대, 섬·산·강 등 자연을 감각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이생진, 토속적이면서도 현대적 감각을 놓치지 않고 있는 이봉신, 그리고 동인들의 시를 영역해오다 직접 시를 쓰게 된 김준회씨 등 제각기의 독특한 시 세계를 구축해 오고 있다.
지향점을 찾는 것은 시적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니 동인으로서의 지향점을 찾지 말자는 것이 오히려 이들을 끈끈하게 묶을 수 있었던 끈. 각박한 세상의 숨통을 틔우는 시에서조차「앞으로 우리는 이런 시를 쓰도록 하자」는 등 동인들의 시 세계를 서로 간섭하지 않는 것이 분수 동인을 이끌고 온 것이다.
『우리들을 20년간 이끌고 온 것은 까치와 나비와 꽃이 있던 혜화동 로터리 분수입니다. 플라타너스와 코피 냄새가 있고 조병화 황금찬 정한모 박희진 김장호씨 등 시인과 수많은 예술인들이 살고 거닐었던 혜화동은 시의 냄새를 품기는 서정적 거리였습니다. 지금은 분수위로 고가도로가 지나 하늘을 가르며 정신적 황폐를 느끼게 하고 있지만 우리가 처음 만났을 맨 분수위로 펼쳐진 무한한 하늘만 보아도 절로 시가 나왔을 정도였습니다.』
퇴근 후 곧장 혜화동에 있는 카페 카사로 가 혜화동을 지키며 시를 쓰고 있는 정강로씨는 서울 속에 조용한 문학의 섬으로 떠있는 혜화동이야말로 분수동인의 고향이라고 말한다. <이경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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